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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충남부여]백제 패망의 슬픈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낙화암과 고란사

by 柔淡 2010. 7. 8.

부소산성의 가장높은 봉우리인 사자루에서 백마강을 향해 조금만 걸어내려오면 바로 낙화암에 다다른다.

그런데 낙화암은 낙화암 위에서보면 잘 볼수가 없다. 백마강위에서 배를 타고 보아야 제대로 보이는것이다.

 

황포돛배를 타고 올려다본 낙화암

 

부여 백마강변의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진 곳이라 한다. 『삼국유사』, 『백제고기』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

이었다고 하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에 세운 것이다.

 낙화암 전경

 그런데 과연 여기서 3000여명의 궁녀가 떨어져 죽었을까? 백화정이 없을때에는 두세명이 서기도 어려운 공간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절벽에서 뛰어 내린다 해도 백마강으로 바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위에 부딪히고 몇번을 구른후에야 떨어지는 경사구조다.

자료를 찾다보니 마침 건국대 신복룡교수님의 낙화암에 대한 글이 있어 옮겨본다.

 

낙화암에 전설에 대한 건국대 신복룡교수님의 글 

 

백제가 멸망하던 날, 궁녀들이 백마강에 투신 자살한 것은 사실로 확인이 된다. 심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의 기록에 의하면, 그 날 궁녀들이

왕포암(王浦巖)에 올라가 물로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전한다.(‘삼국유사’ 권1 태종 춘추공 조) 이후 고려 시대에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1298∼1351)이 부여를 돌아보고 ‘하루 아침에 도성이 기왓장처럼 부서지니 천 척의 푸른 바위가 이름하여 낙화암이러라

(一日金城如解瓦 千尺翠巖名落花)’라 시를 짓고,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시인인 이존오(李存吾·1341∼1371)가 ‘낙화암 밑의 물결은 호탕한데

흰 구름은 천 년을 속절없이 떠도누나(落花巖下波浩蕩 白雲千載空悠然)’라는 시를 지은 것을 보면 고려 시대에 이미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백성들의 과음(過飮)이 심해지자 세종대왕께서 “신라가 망한 것이 포석정(鮑石亭)의 술판 때문이었고 백제가 낙화암에서

멸망한 것이 모두 술 때문이었으니 백성들은 과음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것(‘세종실록’ 15년 10월 28일 정축 조)으로 보아 이 때 이미

낙화암이라는 말이 흔히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동국여지승람’(권18 충청도 부여 편·1481)에 이 곳의 지명이 공식적으로 낙화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투신 자살했던

궁녀들의 숫자는 나오지 않는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패망할 당시 수도인 부여에는 총 1만 가구가 살았으니 인구는 4만5000명 정도였으며,

2500명의 군대가 있었다.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인구 4만5000명에 군대는 2500명이었던 도성에서 3000명의 궁녀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 당시의 농업

생산력이나 주거 공간을 감안할 때 과연 가능했을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부여의 인구가 9만5000명인데 현재의 도시 능력으로도

궁녀 3000명을 거느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부여 어디에 3000명을 수용할 주거 공간이 있는가.

그렇다면 ‘3000 궁녀’라는 말은 누가 먼저 했을까. 어떠한 1차 사료로도 궁녀가 3000 명이었고 그들이 낙화암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는다. 안정복(安鼎福)의 기록(‘동사강목’권2 경신년 추7월 조)에 따르면‘여러 비빈들(諸姬)’이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내가 과문한 탓이라고 생각되지만, 3000 궁녀가 낙화암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글을 처음 읽은 것은 일제 시대에 나온 윤승한(尹昇漢)의 소설

김유신’(金庾信·야담사·1941)이었다. 그에 관한‘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아마도 이홍직(李弘稙)의‘국사대사전’(지문각·1962)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홍직이 3000 궁녀의 첫 발설자라는 뜻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3000 궁녀 얘기는 있었다. 이홍직은 참고 문헌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적어놓았으나 그 책에는 그런 얘기가 없다. 아마도 구전을 그렇게 정리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런 얘기와 함께 의자왕의 평소 공적이나 행실을 비교해 보노라면 나는 의자왕에 대해 일종의 연민을 느낀다.

그는 무왕(武王)의 아들로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고 부모에 효성이 지극해 해동증자(海東曾子)의 칭호를 들었다. 집권 초기에는 국력이 부강해

신라를 제압했고, 성충(成忠),흥수(興首),계백(階伯)과 같은 충신이 있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다만 자식의 죽음으로 복수심에 불타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에 의해 이뤄진 나당연합군의 정복 전쟁에 대비하지 않은 것은 그의 실책이었다. 결국 재위 20년만인 서기 660년

전쟁에서 패한 그는 중국으로 끌려가 그 해에 죽어 망국의 제후들이 묻히는 망산(芒山)에 매장됐다.

 

요컨대 의자왕과 낙화암에 관한 역사는 허구이다. 그에 관한 어떤 일차 사료도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일제시대 식민지 사학자들이

백제를 비하하기 위해 꾸며낸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의자왕이 황음무도(荒淫無道·주색에 빠져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도리를 하지 않음)했고, 궁녀 3000명을 데리고 살았다는 식으로 역사를

곡필했으며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자료로 그를 인신 공격했다. 그런 점에서 의자왕도 이 나라 역사의 한 원혼이 되어 구천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글씨

 

 

 낙화암위의 백화정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지은 정자이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부소산성(扶蘇山城)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평면을 6각형으로 지은

정자(亭子)이다. 정자의 바닥을 지반에서 높이 뛰우고 남쪽에 나무 계단 하나를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평난간을

설치해 두었다. 천장에는 여러 가지 연꽃 문양(紋樣)을 그려 놓았다. 정자에 올라서서 보면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백화정에서 내려다본 백마강

 

 낙화암 나루터

 여기도 4대강 사업이 한창이다. 

 

 낙화암 나루터

 

 3천궁녀는 아니지만 백제가 멸망하던때 이곳 낙화암에서 망국의 한을 안고 뛰어내린 궁녀와 장병들을 추모 하면서 100m정도

내려오면 고란사가 있다.

 

 

 

 

 부소산 북쪽기슭의 백마강 좌안(左岸)에 자리한 고란사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법당과 요사(窯舍)의 건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사찰이다.

이 사찰은 불적(佛跡)보다는 고란초에 의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법당 뒤편에서 나오는 약수와 함께 이 사찰의 명물을 이루고 있다.

고란사는 백제멸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하나 정확한 유적이나 유물은 없고, 현재의 고란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는데

현 사찰건물(寺刹建物)은 은산(恩山) 승각사(乘角寺)를 이건(移建)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유명한 고란사 약수물. 야생에서 자라는 고란초는 볼수 없었다.

 

 

 

 

 

 고란사에서 50m정도 내려오면 낙화암 선착장이 있다.

그러니까 부소산성 입구에서 출발해서 여러개의 루를 둘러보고 낙화암, 고란사까지 내려오면 왔던길을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는

백마강 유람선을 타고 구드레 나루터로 가는 여러모로 좋다는 이야기가 된다.

 

 구드래나루터로 가기위해 이번에는 선화호를 탄다.

 멀리 구드래 나루터가 보인다.

 

 한여름에 손님을 맞기위해 정비해놓은 황포돛배들

 멀리부여대교와 수북정이 있는곳

 금강 상류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