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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경북영천]원효, 의상대사 등 역사속의 고승들이 머물렀던 팔공산 은해사

by 柔淡 2010. 8. 24.

영천에는 1978년 사관학교 4학년때 친구집에 가느라 한번, 그리고 1996년에 출장으로 한번 가본것이 전부였다.

팔공산은 대구나 군위의 어느산인줄 알았는데 대부분이 영천에 속해 있는 큰산이라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직업군인으로 생활하면서 이사를 스무번도 더다니고 경남, 전남, 강원도 충청도, 서울, 경기 등 전국 각지에서

살아보았지만 유독 경상북도에는 살아보지 못했고 서울에서 거리가 머니 여행도 잘 안가게 되는 곳이다.

그러니 팔공산 은해사도 이야기는 들어 보았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가본곳이다.

 

은해사 소개 (은해사 홈페이지 인용)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이다. 이 절은 809년(헌덕왕 1) 혜철국사(惠哲國師)가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하여 해안사(海眼寺)라고 불렀다.

그후 중건과 중창이 계속되었는데 1270년(원종 11) 홍진(弘眞)국사가 크게 확장하면서 대가람이 되었고, 1275년(충렬왕 1)에는 원참(元旵)이

중건했다. 1485년(성종 16)에는 죽청(竹淸)과 의찬(義贊)이 묘봉암(妙峰庵)을 중창하고, 1543년(중종 38)에는 보주(寶珠) 등이 중수했다.

1546년(명종 1)에는 천교(天敎)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 새로 절을 지었으며, 이때 인종의 태실(胎室)이 되면서 은해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1563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음해에 묘진대사(妙眞大師)가 중건했으며, 1667년(현종 8)에 백흥암과 명부전을 중수하는 등 계속 부분적인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다. 1689년(숙종 15)에 법영(法英)·의연(義演)·광심(廣心)이 중창하여 대가람이 되었다.

그러나 1847년(헌종 13) 은해사 창건 이래 가장 큰 불이 나서 모든 건물이 소실되자 팔봉(八峰) 등이 주관하여 중수를 시작했으며, 근대까지

계속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설선당·심검당·종루·보화루·독성각·요사채·승당 등 24동에 이르며, 말사 39개, 포교당 5개, 부속암자 8개를

두고 있는 대본사이다. 이 절과 부속암자에 있는 중요문화재로는 거조암영산전(居祖庵靈山殿:국보 제14호)·백흥암극락전수미단

(百興庵極樂殿須彌壇:보물 제486호)·운부암청동보살좌상(雲浮庵靑銅菩薩坐像:보물 제514호)이 있고 기타 60여 점의 사중보물이 있다.

 은해사 전경.

예전에는 대웅전이었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있었는데 지금은 극락보전으로 부른다.

 은해사 입구의 절경

 보화루. 추사의 글씨라고 한다.

 오래된 향나무

은해사 동종. 오대산 상원사의 동종이 은해사에서 가져갔다는 전설이 있다. 

 

 

 

 

아미타 삼존불상

대웅전 안에는 아미타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목불로서 밋밋한 느낌이 듭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고 그 수인(手印)으로 보아

아미타 불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미년 대화재 당시 당우가 소실되었는데, 이때 극락전에 있던 이 아미타불좌상을 이후에 대웅전을

지은 다음 본존으로 모셨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 불상은 측면 처리가 얇은 것이 흠인데 이는 큰 통나무 하나를 파서 만들었기 때문에 재료의 한계성에 기인한 듯합니다.

아마도 이 불상의 제작시기는 선조(1568~1608) 연간 중창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장전

 

 

 성보박물관의 전시물들

 

추사 김정희의 글씨

조선조 영조와 정조시대에 은해사는 영파성규 대사가 주석하면서 화엄종지를 크게 드날리고 있었다. 이 때 추사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그 생부 김노경 공을 따라서 경상도 일원의 명승지를 여행하면서 이 은해사 일대도 들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헌종 13년의 대 화재 뒤 헌종 15년에 마무리 지은 불사때 지어진 건물 중에서 대웅전,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라서

마치 화엄루각과 같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뒤 고종 16년(1879)에 영천군수 이학래가 다시 쓴 '은해사 연혁변'에서는 '문액의 은해사와 불당의 대웅전, 정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의 글씨이고 노전을 일로향각이라 했는데 역시 추사의 예서체이다'라고 하고 있다.

 

추사 선생은 안동 김씨와의 세도 다툼에 패하여 55세 나던 헌종 6년(1840) 9월 2일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 세월을 보낸 다음 헌종 14년

(1848) 방면되어 다음해 봄에 64세의 노인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유배중에 불교에 더욱 깊이 귀의하게 된 추사 선생은 영파대사의

옛터이며 또 자신의 진 외고조인 영조대왕의 어제 수호완문을 보장하고 있는 묵은 인연이 있음을 생각하고 현판과 문액을 기꺼이 써 주기로

작정하였던 것 같다.

이렇듯 거듭되는 인연에 제주도 유배기간 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최고로 발휘한 추사의 글씨가 새로 지은 전각들의 편액을 장식함으로써

과연 화엄루각의 장엄을 이루게 되었다. 1851년 추사는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불과 2년 남짓의 짧은 서울 생활 동안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추사의 글씨가 다섯점이나 은해사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이 깊기 때문일 것이다.

 

간송 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추사선생 글씨 중 "은해사"의 글씨를 이렇게 평했다." 무르익을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구부려 놓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뗀 것 같은데 기수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하지만 필획의 태세 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문 위의 편액인 은해사,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 불광각, 노전의 일로향각 이 다섯점의 추사 글씨는 은해사의 자랑이자 소중한

문화재이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가 그리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은해사 입구에 하마비가 있는 이유는?

인종의 태실이 은해사에서 운부암으로 가는길 좌측 산중에 있고 은해사가 그 수호사찰로 지정되었기에

"대소인하마비"란 표지석이 있는거라고 한다.

 은해사 입구 보화루앞의 계곡. 36도를 넘는 뜨거운 날씨라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영천은 사실 대구보다 더 더운 고장이다.

 운부암을 먼저 다녀왔는데 은해사에서 운부암까지는 2.5km 거리다.

 역대 조실스님들의 부도군

 

  은해사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곳은 주차장에서 은해사 보화루에 이르는 소나무숲길이다. 

 

 

 

이 숲길을 지나다 보면 독특한 연리지가 하나 있는데 100년이 넘은 참나무와 느티나무의 연리지다.

연리지의 유래는 당태종과 양귀비로 부터인데 자세한 내용은 아래 간판글을 참조하시라. 

 

 솔향기 가득한 소나무숲길. 그늘이 져서 더위도 물리치고 피톤치드의 향기가 머리를 맑게한다. 

 

 

 

 다음은 은해사의 부속암자 운부암을 둘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