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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강원

[강원강릉]조선시대 최고의 소설가와 여류작가 남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by 柔淡 2010. 9. 7.

허균, 허난설헌 생가 바로옆에는 이들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전시해 놓은 기념관이 있다.

강릉이 낳은 대표적인 작가 남매를 기리는 기념관 치고는 너무 작고 조촐하다.

 

앞에서는 허균에 대해서 알아 보았으니 이번에는 허난설헌에 대해 알아보자

 

허난설헌(許蘭雪軒)에 대하여

1563년(명종 18)∼1589년(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릉 출생.
엽(曄)의 딸이고, 봉(篈)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이다.
가문은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으로 누대의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아버지가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강릉김씨(江陵金氏) 광철(光轍)의 딸을 재취하여 ·초희·
3남매를 두었다.
이러한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허씨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으며, 15세 무렵 안동김씨(安東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다가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마저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고뇌를 달래며, 생의 울부짖음에
항거하다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일부를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文台屋次郞)
가 간행, 애송되었다.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고, 국한문가사 〈규원가 閨怨歌〉와 〈봉선화가 鳳仙花歌〉가 있으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중기에 재주많은 여인이 고된 세파를 헤쳐나가기는 그리 쉽지 않았을것이다.
 

 기념관

 소나무 숲에 둘러쌓인 풍경이 정말 아름답고 아늑하다.

 

 

 

 허난설헌 동상

 목화꽃

 

 기념관 입구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아버지 허엽으로부터 허균, 허난설헌 등 다섯남매의 생애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말그대로 시대를 너무 앞서간 허균, 허난설헌 남매

 

 

 

 

 

 

 

 

 허씨집안 대표적인 문인들의 작품을 새겨놓은 비

 나팔꽃의 자주색이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