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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경기양평]1100년을 버텨온 우리나라 최고의 고목, 용문사 은행나무

by 柔淡 2010. 10. 11.

10월 두번째 주말인 9일 , 10일은 1년중 여행하기 가장 좋은 때인데다 날씨까지 좋아 주말 여행을 떠나지 못한 나로서는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토요일엔 고등학교때 친한 친구 아들의 결혼식이 있어서 피치 못하게 데이지 혼자서 울진으로 여행을 가고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혼자서 집에 있으려니 온몸에 좀이 쑤셨다. 한강으로 불곷놀이 장면을 찍으러 가려다가 100만 인파가

몰릴것이라는 기사를 보고 일찌감치 포기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10월 10일, 일요일 아침 초등학교 동창들과 오랫만에 양평 용문사를 찾았다.

용문산에서 제2회 전국 산악인 등반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우리가 용문산 중턱까지 갓다가 돌아오는 동안에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정상까지는 가지 않기로 하고 50년지기 친구들이 옛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오르내린 용문산의 풍경중 압권은

당연히 은행나무 였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1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부분 둘레 15.2m이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가운데 나이와 높이에 있어서

최고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줄기 아래에 혹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나무는 통일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외에도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는데 그 자리에서 피가 났다는

이야기, 정미의병(1907) 항쟁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소리를 내어 알렸다고도 한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당상관(정3품)이란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져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2009년 태풍때 중간부분의 나뭇가지가 부러져서 보기에 좋지 않았는데 양평소방서에서 손질을 해서 그런지 몇년전에 봤을때보다

훨씬 건강하고 힘있게 보인다. 지금도 1년에 은행 30가마를 수확한다고....

 

1100년을 버텨온 은행나무의 위용. 어떤자료에는 1500년이라고 나온다. 

 

 아직도 청년의 모습이다.

 

밑둥에는 커다란 혹이있다.

 

 

 

용문사 주차장 의 은행나무는 벌써 노란색으로 물들어 간다.

 

 

 

일주문을 지나서 용문사로 오르는길

 

길가의 물소리가 정겹다.

 

용문사 입구에는 구절초가 제철이다.

 

계곡에는 아직도 여름의 푸른 기운이 남아있다.

 

 

 

 

계곡 곳곳에는 가족단위로 쉬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도 두시간정도 계곡에서 쉰다음 다시 하산....

 

 

은행나무를 다시 찍어본다.

 

 

 

구절초가 역곽을 받아서 아름답다.

 

용문사의 전통찻집

 

 

 용문산 랜드라는 유원지도 있다.

 

 정상에 오르지 못한게 아쉬워 망원렌즈로 당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