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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대구]방천시장에서 우리시대의 가객 김광석의 영혼을 만나다!

by 柔淡 2011. 5. 2.

여행매니아인 내게도 대구는 늘 지나가는 도시였다.

경주나 영천, 울산을 가기위해 동대구역에서 내려서도 곁눈질 한번 없이 바로 차를 갈아타고 그냥

지나치던 도시였던 대구, 그런 대구를 오로지 여행을 목적으로는 처음 찾은것이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가수 김광석이 대구, 그중에서도 방천시장과 이런 인연이 있는줄 몰랐고 마침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김광석매니아]라는 인터넷 카페에서 행사를 갖는줄도 모르고 갔는데

그곳에서 "김광석 다시부르기"라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방천시장은 대구의 3대시장이었는데 요즈음 SSM이라는 초대형 마켓이 곳곳에 들어서는 바람에

거의 망하기 직전의 단계까지 갔다가 "예술과 전통시장의 만남"이라는 프로젝트에 의지해서

조금씩 다시 살아나는 과정에 있는 시장이다.

 

김광석은 대구에서 태어나 4년밖에 살지않고 서울로 이사를 했지만  바로 방천시장이 있는

대봉동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방천시장과 김광석의 연결고리가 생긴것이다.   

 

대구매일 인용

방천시장을 다시 살리는 프로그램은 이름을 시장답게  "문전성시(門前盛市)"라고 짓고 특히 쇠퇴한

전통시장에 예술을 접목시킨다는 파격적인 발상과, 상인과 예술인들의 '윈-윈'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시장 점포에 20여 명의 예술가들이 입주해 기존 상인들과 손을 잡고 콘크리트 벽면을

예술작품으로 바꾸었다.

또 예술가들은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속닥속닥 수다방, 아트스페이스 방천, 리뉴얼 도미노 상점,

방천시장 사진전, 예비작가 아카데미, 방천신문, 방천 라디오 스타 등 유`무형의 문화상품을 개발하면서

전통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작업실을 체험공간으로도 개방했다. 상인들이 찍은 대형사진이 걸리고,

미니 카페와 쉼터 등도 갖추면서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재창출된 것.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지만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위주로 소개한다.

 

김광석 다시그리기 길의 김광석 그림, 김광석의 실물 그대로 인것 같다. 

 [김광석 매니아]라는 카페에서 "김광석 다시부르기" 라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고

 

 

 아쉽게도 전체를 다 들어볼수는 없었지만 카페 주인장의 노래를 몇곡 감상했다.

 

 

 시장골목안의 작은 장소지만 많은 분들이 김광석을 추모하기 위해 모여들어 그의 노래를 감상하고 있었다.

 김광석 소개글

 김광석 연보, 33세의 나이로 스스로 삶을 마감한 우리시대의 가객.

요즈음 젊은이들까지도 김광석의 노래 한두곡은 흥얼거린다. 

 

 김광석 다시그리기 길에 있는 작품들

 

 

 

 

 

 

 

 

 방천시장 입구에 있는 김광석 동상.

김광석은 젊은이들의 고뇌와 진솔한 마음을 대변하는 동물원의 리드 보컬로 시작하여 솔로 활동을 하면서 10여년의 음악 인생을 통해 국내 포크 음악의 명맥을 이어간 이 시대의 진정한 가객(歌客)이었다.

그가 죽는 순간까지 아무도 그의 고통을 몰랐던 것과 같이 그는 언제나 슬픔을 속으로 삭히는 사람이었다. <나의 노래>와 <일어나>같은 희망에 가득찬 노래들을 동시에 부름으로써 그는 포용하고, 이해하고, 결국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을 담고자 했다. 그의 삶이 노래와 함께 흐른 이유도 그것이다.

1964년 1월 22일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경희 중학교 현악반에 들어가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등의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음악의 기초를 쌓아갔으며, 명지대 재학시절 대학 연합동아리 '연합 메아리'에 가입하여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1984년 그는 김민기의 「개똥이」음반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 때 함께 한 이들과 의기투합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결성한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냉철하게 비판하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노래로써 사회개혁 운동을 하는 단체였다. 결국 그는 노.찾.사라는 그룹이 가지는 한계 때문에 그룹을 탈퇴하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는 것이 아닌 진솔한 인간의 삶을 노래하는 '동물원'이라는 그룹을 결성하게 된다.

1987년 '산울림' 김창완의 도움으로 동물원은 데뷔 앨범 「거리에서」를 발표한다. 동물원의 음악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음악이었다. 당시 동물원의 음악은 젊은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이들의 음악은 젊은이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결성 당시 7인조였던 동물원에서 노래를 부르던 김광석은 그 후 2집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별빛 가득한 밤에」까지의 활동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음악을 찾기 위해 팀을 탈퇴하고 <너에게>, <기다려줘> 등의 곡이 담긴 솔로 1집을 발표한다.

그의 음악의 주된 주제는 사랑이고 삶에 대한 메시지이다. 그는 지나친 풍자를 자제하고 늘 소박한 자세로 일관하며 이별, 사랑,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던졌다. 1991년에 발표한 2집은 그를 더욱 대중적인 위치로 올려놓았는데 한동준이 제공한 <사랑했지만>과 <사랑이라는 이유로>, <슬픈 노래> 등이 사랑을 받았다. 소극장 무대를 고집하며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길 원했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소박한 포크 음악의 참맛을 들려주었던 그는 <나의 노래>가 실린 3집과 <일어나>가 실린 4집의 연이은 성공으로 소시민을 대표하는 가수로 확고한 위치를 잡는다.

그동안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1993년에 발표한 「김광석 다시 부르기」는 노,찾,사와 동물원 시절의 그의 모든 곡들을 집대성했으며, 1995년에 발표된 「김광석 다시 부르기II」에서는 삶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나타난다.

통산 6장의 독집 앨범을 내고 1995년 8월 1000회 기념공연을 마친 김광석은 1996년 1월 6일 사망했다. 사후에도 동료, 후배 뮤지션들의 추모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선후배 동료 뮤지션들은 그를 추모하기 위한 헌정 앨범 「가객/ 부치지 않은 편지」와 「Anthology /다시 꽃씨 되어」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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