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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전주]유구한 역사와 전통으로 사극 드라마 촬영지로 이름난 전주향교

by 柔淡 2011. 11. 2.

전주에서 하룻밤을 묵은 한옥민박 부용헌 바로옆이 전주 향교다.

전주는 이태조의 어진이 모셔져 있는 경기전을 비롯해 오목대, 이목대, 한옥마을, 전주 향교 등

조선시대의 역사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역사와 예향의 도시답게 향교도 아주 역사가 깊고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런연유로 성균관 스캔들, 뿌리깊은 나무 등 사극 드라마 촬영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고려 말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당시의 위치는 현재 경기전(慶基殿) 근처였으나 태조(太祖) 이성계의 수용(?容)을 봉안하기 위하여

경기전이 준공되자 1410년(태종 10) 전주성의 서쪽 황화대(黃華臺) 아래로 이전하였다.

그 뒤 1603년(선조 36) 순찰사 장만(張晩)이 좌사우묘지제(左社右廟之制)에 어긋난다 하여 조정에 보고,

왕의 재가를 받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654년(효종 5)·1832년(순조 32)·1879년(고종 16)·1904년에

중수하였고, 1922년에 명륜당을 보수하였다.

 

조선 후기의 경내 건물로는 3칸의 대성전, 각 10칸의 동무(東?)와 서무(西?), 신문(神門), 외문(外門),

만화루(萬化樓), 5칸의 명륜당, 각 6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3칸의 계성사(啓聖祠), 신문(神門),

입덕문(入德門), 4칸의 사마재(司馬齋), 6칸의 양사재(養士齋), 2칸의 책판고(冊板庫), 직원실, 제기고

(祭器庫), 수복실 등 총 99칸인 대규모의 건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향교는 전라도 53관의 수도향교(首都鄕校)라 칭하였다.

 

그 뒤 만화루는 1886년(고종 23)에 홍수로 수몰되었고, 책판고는 관찰사 조한국(趙翰國)이 관고(官庫)

소유 책판을 전주향교로 이장하여 책판고 내에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1920년의 홍수와 1950년 6·25전쟁

으로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5성(五聖)·10철(十哲)·송조 6현(宋朝六賢)

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또 동무·서무에는 유약(有若)·복불제(宓不齊)·복승(伏勝)·동중서(董仲舒)·한유(韓愈)·

이통(李?)과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대성전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면 3칸에는 널문을 달았으며, 도리기둥에 맞배지붕이고, 양합각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좌우 1칸씩은 눈썹지붕을 이어 달아 꾸몄으며, 전면에는

모두 널문을 달았다. 따라서 눈썹지붕의 도리가 뺄목으로 되어 길게 뻗어 나와 있는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9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소장 전적으로는 판본 67종 93책, 사본 32종 51책의 총 99종 144책이 있다.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전주여행 2일차, 오늘의 일정은 오전중 한옥마을투어 한가지 뿐인데 볼거리가 많아 시간이좀 걸릴것 같다.

숙소 바로옆에 있는 전주향교부터 시작한다.  향교의 정문 만화루, 반드시 오른족으로 들어가야 한다.

 

 모과열매가 탐스럽다.

 

  한옥마을 둘레길에 있어 걷다보면 만날수 있다.

 

 

 퇴직한 어르신들로 구성된 투어토커 은빛 길잡이라는 해설사 분들께서 구간별로 해설을 해주신다.

 경복궁에는 일화문과 월화문을 구별해서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던데 향교는 일월문이라고 통합해서 만들어 놓았다.

 

 대성전

 뭐니뭐니해도 전주향교의 상징은 은행나무다.

1603년 현위치로 향교를 이전 하였다니 은행나무들의 나이도 거의 400년에 가까운데 아직도 싱싱하다.

 

 

 작년에도 10월 23일경에 왔었는데 그때도 은행나무는 초록잎을 달고 있었다. 올해도 시기가 일러 노란 은행잎은 못보고 간다.

 

 

 

 

 오래된 산수유나무의 열매가 탐스럽다.

 

 대성전안에 모셔진 중국과 우리나라 유교 성현들의 위패

 

 

 이제 족문을 통해 명륜당으로 들어선다.

 명륜당은 유생들이 공부하는 교실이다.

 

 

 지금도 일요일 마다 초등학생을 위한 서당이 열리고 있고 한학에 조예가 깊으신 어르신들이 어린아이들을 가르치신다.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무와 서무가 있는데 동무엔 양반자제, 서무엔 평민자제들이 숙식을 했고 정원이 90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향교의 유생들은 병역을 면제해 주는 제도가 있어 병역의무를 지지않기 위해 향교에 많이 지원을 해서

늘 정원이 초과되었다고.... 그때나 지금이나 군대를 안가려는 마음은  

 

 

 

 신기하게 명륜단 앞 좌측에 있는 은행나무위에 소나무 한그루가 싱싱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제 바로옆에 있는 동헌과 고택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