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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장성]1400년된 고찰, 호남불교의 총본산 고불총림 백양사

by 柔淡 2011. 11. 29.

지난 11월 4일 백암산과 내장산의 단풍을 돌아보고 왔는데 단풍만 소개하고 근본이 되는

백양사와 내장사를 소개하지 않았었다. 이제 그 두 절집을 소개하려한다.

 

백양사는 내게 인연이 참 많은 절집이다.

직장일로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전라도 장성에 3년동안 살은 적이 있다. 그시절은 여러가지로

일이 안풀려서 힘들었던 때여서 수시로 산으로 내달렸는데 그때 가장 많이 찾은산이 백암산과

바로 옆에 있는 남창계곡이었다.

그중에서도 인상에 남는 장면은 산행을 마치고 땅거미가 질무렵 낮동안 관광객으로 왁자지껄

했던 절집주변이 고요해진 가운데 저녁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절집주변에 울려퍼지면

나도 모르게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감동적인 경험을 했던거였다.

그래서 내 뇌리속에는 백양사가 가장 인상적인 절집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백양사 소개글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백암산(白巖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다. 632년(무왕 33) 여환(如幻)이 창건하여 백양사라고 하였으며,

1034년(덕종 3) 중연(中延)이 중창하면서 정토사(淨土寺)라 개칭하였고, 1350년(충정왕 2) 각진국사

(覺眞國師)가 3창하였다.

15세기에 백암사(白巖寺)로 바뀌었다가 16∼19세기 중반에 다시 정토사로 고쳤다.

다시 백양사로 개액(改額)한 것은 1574년(선조 7) 환양(喚羊)이 중건하면서부터이다. 환양이

백양사에 주석하면서 매일 ≪법화경≫을 독송하니 백양이 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일이 많아

절 이름을 백양사라 개칭하고 승려의 법명도 환양이라 하였다.

그 뒤 1786년(정조 10) 환성(喚惺)이 중건하였고 1864년(고종 1) 도암(道巖)이 중건하였으며, 1917년

송만암(宋曼庵)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암은 45세 때부터 백양사 주지직을 맡아 30년

가까이 주석하면서 불사(佛事)에 진력하는 한편, 강원(講院)을 개설하고 중앙불교전문학교장을

겸임하면서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백양사는 31본산시대의 본산이었으며, 현재 부속 말사 26개 소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극락보전(極樂寶殿)·명부전(冥府殿)·칠성각(七星閣)·진영각(眞影閣)·

천왕문(天王門)·선실(禪室)·요사채와 범종·법고·목어·운판 등의 사물(四物)을 소장하고 있는 범종각

(梵鐘閣)이 있다.

 

 백양사 쌍계루 뒤편의 단풍

 쌍계루

 약사암으로 가는 길

 대가람 백양사

 

 고불총림을 만들어서 불교정화를 최초로 시도했던 송만암 대종사 고불총림도장

 사천왕문

사천왕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 조선독립의 염원이 살아 숨 쉬는 해방사천왕을 모신 사천왕문

1945년 복원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 사천왕을 모신 건물로 익공식과 주심포식을 사용한 절충식 건축물이다.

수미산 중턱에서 동서남북의 네 방향을 지키면서 불법 수호와 인간 선악의 관찰, 그리고 사부대중의 보호가 그 임무였다.

 범종각
범종각은 왼쪽에 위치한다. 그 역할은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자의 격려의 의미로 상징되었던 것이 점차 그 의미가 지옥중생 구제로 확대되었으며, 종에 새겨진 인물도 처음에는 하늘의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상에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로 변화되고 있다.부처님은 왼쪽을 중요하다고 하는데 종은 오른쪽에 있을까? 이는 왼쪽을 공사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백학봉

 만세루, 뒤쪽에는 우화루 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범종과 우화루 사이 키 큰 나무가 한그루 서 있는데 이 나무는 석가모니가 그 나무 아래에서 부처가 되었다는 보리수이다. 피나무과에 속하는 보리수이며,

불교에서는 신성한 나무로 이 나무의 열매는 염주를 만들때도 쓰인다.

현재 백양사 보리수 둘레에는 소원패를 달아 자신이 염원하는 일이 꼭 이루어지도록 발원하고 소원을 빌고 있다.

 

 

 고불선원

 석가8층석탑

백양사 불사리탑은 대웅전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방형의 하대석위에 연꽃을 장식한 엔타시스형 석주로 중대석을 삼은 8층 석탑이다. 탑은 본디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무덤으로, 홀수 층으로 만드는 것이 정석이나 이 탑은 짝수인 8층으로 되어 있어 불교의 8정도(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탑은 일본의 홍법(弘法)(774~835)대사가 天竺(지금의 인도북부)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백용성(白龍城)(1864~1940)스님이 모시고 있다가 1924년 만암선사가 백양사에 이를 봉안하여 탑을 세웠다. 탑의 모습이 기존의 석탑과 상이하고 중대석과 탑신의 석재의 재질도 달라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는 탑이다. 본래 석탑은 대웅전 및 금당 앞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것에 비해 이 탑은 대웅전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는 탑으로 불상을 대신한다는 의미에서 건립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인 대웅전은 1917년 송만암이 백양사를 중건할 때 건립한 것으로 내부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1979년 보각행(普覺行)이 조성하여

새로 모신 10척 높이의 불상, 그 왼편에 용두관음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또한 대웅전 내 오른쪽으로 바늘귀를 꿰는 모습, 등을 긁는 모습 등 해학적인 모습을 한 나한상 23체가 봉안되어 있다

 진영각, 칠성전

백양사 진영각, 칠성전은 다른 지역의 진영각 및 칠성전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진영각과 칠성전은 독자적인 건물을 갖고 있으나 백양사의 경우에는 하나의 건물로 이어져 있다. 진영각, 칠성전을 전체적으로 보면 정면4칸 측면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진영각이 정면3칸, 칠성전이 1칸을 차지하고 있다.

진영각은 사찰의 조사 및 업적이 높은 고승의 진영을 모시는 곳으로 백양사의 진영각에는 개창자인 여환선사를 중심으로 중연선사와 각진국사 및 30여분의 고승의 진영을 모시고 있다.

극락보전

 

백양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1574년(선조 7) 승려 환응이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극락보전이라는 이름처럼 전각 안에 모셔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불상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2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양식으로 당당함을 갖추고 있다. 임진왜란 전에 조성된 불상으로 400여년의 세월동안 백양사와 지역민들과 고락을 함께 해 오셨고 후불탱화 또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불화로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에 따르면 백양사 ?극락전불양계서?의 ?문정왕후빈향축열서(文定王后賓香祝列書)?라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건물을 짓는 데 문정왕후가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판에 극락보전(極樂寶殿)이라고 씌어 있는데, 이 글씨는 동국진체라 여겨진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기본구조는 낮은 석조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으로 처리한 원기둥을 세웠다. 구조양식은 창방 위에 평방을 놓고,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공포를 짜 올렸다. 공포는 안쪽이 3출목, 바깥쪽이 2출목인 다포양식을 취하고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유명한 백양사 고불매

 

 범종각의 뒷모습

  

 

 

 

 이날은 마침 백양사 단풍축제가 열린 날이어서 장성군수와 군의원들이 제례를 올리러 백양사로 들어가고 있었다.

 

 부도전 입구

 

쌍계루 뒤쪽에 위치하던 부도전을 옮겼는데 일광정을 지나 걸어오다 보면, 왼편 언덕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보인다. 돌계단을 올라 팔각의 문 안으로 들어오면

부도전이 있다. 청허 휴정, 사명유정 등 역대 고승 18분의 사리와 유골을 모신 부도, 비석들을 모시고 있다. 소요대사 부도는 2002년 보물 제1346호로 지정되어

박물관 내부로 모셨다

 

다음은 내장사를 소개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