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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정읍]우리나라 최고의 단풍명소, 1400년된 고찰 내장산 내장사

by 柔淡 2011. 12. 1.

11월4일 하루만에 백양사와 내장사 일대의 단풍을 둘러 보았는데 포스팅을 하면서 내장사 절집에

대한 소개를 못했었다. 전라도 장성에 3년정도 살때 백양사와 내장사에 자주 갔었는데 서울로

이사를 온후 자주 들리지 못했다가 2005년 단풍철에 무박2일로 내장과 백양산에 종주를 하러

갔다가 주차장에서 네시간동안 꼼짝못하고 갇히는 바람에 단풍철에는 다시 가보지 않았었다.

 

반면에 2009년 여름휴가때 데이지랑 둘이서 내장사에 잠깐 들렀는데 거기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작가이자 사진그룹 매그넘의 회장이신 압바스를 우연히 만나서 사진을 함께 찍은 좋은

추억도 있는 곳이다. 

 

단풍에 대해서는 앞서 포스팅했으니 생략하고 이번에는 내장산 절집에 내해 소개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내장사는 1400여년된 고찰임에도 불구하고 단풍의 유명세 만큼 절집의 건물이나 보물은

전해져 내려온게 없다. 아마 한국전쟁을 포함한 다섯번의 대화재로 많은 건물들이 소실된

때문인것 같다.

 

내장사는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 백제 제30대 무왕(600-640)37년인 서기 636년(백제멸망 660년

24년 전)에 당시 도승이신 영은조사께서 지금의 절 입구 부도전 일대로 추정되는 자리에 대웅전등

50여동에 이르는 대가람으로 백제인의 신앙적 원찰로서 영은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고 1098(고려조

숙종3년) 행안선사께서 전각당우를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자세한 연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1557년(조선조제13대 명종12년) 희묵대사가 법당과 요사를,1639년(인조17년) 부용대사가 사우를

중창하고 불상을 개금했으며,1779년(정조3년) 영운대사가 대웅전과 시왕전을 중수하고 요사를 개축하였다.

1923년 백학명 선사가 사세를 중흥시킨 뒤 1938년 매곡선사가 대웅전과 명부전, 요사등을 신.개축하여

현 위치에 내장사의 면모를 일신시켰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1951년1월12일 소실된 것을 마지막으로

창건이래 5화 7건으로 역사가 있다. 1957년 주지 야은스님께서 요사,1958년에 현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1964년 무량수전을 세우고 1965년 대웅전 불상과 탱화를 조성 봉안 하였다.

 

그후 1974년 국립공원 내장사 복원계획에 따라 일주문, 명부전, 정혜루를 복원하고 사천왕문이 신축되었다.

조선조 성종때 석학 성임(1421-1484)은 정혜루기에서 영은사는 고려말엽 지엄선사의 개산에서 비롯된다고

기록한 뒤, 정혜루는 당시 영은사의 문루로 1467년(세조12년)에 시작하여 다음해 준공된 3간으로 그 규모나

형태가 장엄무비하다고 전하고 있다.

최근 내장사는 향적원과 정혜원, 요사등을 신축하고 1994년 10월에는 사리탑을 건립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원래 내장산에는 명찰 영은사가 있었으니 영은사는 지금의 부도전 위치에 있었다.

 

이외에도 내장산은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의 실록이 옮겨져 보관된것으로도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을 1592년(선조 25) 6월 22일에 정읍현 내장산 은봉암 (隱峯庵)

으로 옮겼다. 이 때 경기전 참봉 오희길 (吳希吉)과 유신(柳訊), 수직유생(守直儒生) 안의(安義)와 손홍록

(孫弘祿)의 공로가 컸다.

9월 28일에는 다시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겼다. 전주사고본 실록과 태조 어용은 정읍의 내장산에서 1년 18일을

숨겨 보존하다가 뒤에 해로로 해주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별전(別殿)으로 옮겨 난을 피하였다.

 

 매표소부터 2km정도 들어가야 절집이 있다.

 

 일주문

 뒤쪽

 일주문의 자연스러운 기둥

 부도전 앞의 단풍나무길, 올해는 내장산의 단풍도 예년만 못하다.

원래의 영은사지라고 하는데 1979년 12월 27일 전라북도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었다.
영은사는 636년 영은조사가 창건하였는데 가람이 50여 동에 이르는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1539년 내장산에서 승려들의 난동이 일어난 뒤 이웃한 내장사와 더불어 소각되었다. 1925년 내장사가 벽련암(碧蓮庵)이 있던 자리로 옮기면서 한때 이름이 벽련사로 바뀌었는데 이때 옛 영은사 자리에는 영은암을 두었다. 영은암은 현재 내장사의 부속암자로 되어 있다.

 

당시 영은사를 부흥시킨 신암·해인·두선사의 유골사리등 16좌의 석종 부도와 석탑1좌, 탑비 16개가 있다.

 

 천왕문

예로부터 한국의 사찰에서는 일주문(一柱門)과 본당 사이에 천왕문을 세워, 그림으로 또는 나무로 깎아 만든 사천왕의 조상(彫像)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혜루

 

 천왕문과 정혜루 사이의 우측 공간

 

 관음전 뒤로 서래봉이 보인다.

 관음전

큰 자비의 어머니이신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관세음 보살은 이세상 모든 중생의 소망을 담은 간절한 소리를 듣고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자비의 화신이시다. 관세음 보살의 능력은 어디로든 통하고 두루 미치지 못하는 바가 없으므고 원통대사라고도 한다. 삼재팔난으로 시달리는 뭇중생들을 구원하여 지혜와 복덕을 내리고자 천수천안으로 두루두루 보살피시는 천수천안 관자재 보살인것이다.

 

 3층석탑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3층 석탑이다. 1997년 범여스님이 조성한 탑으로 1932년 영국의 고고학 발굴조사단에 의해 발굴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인도의 고승 지나라타나 스님의 주선으로 내장사에 봉안하게 되었다.
사리란 범어 sarira의 음역으로 보통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수행이 깊은 큰 스님들의 유골을 말하는 것으로서 불자들에게는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영골(靈骨)을 일컫는 말이다.

 대웅전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이 굳건히 자리 잡고 앉아서 진리를 설하시는 전각이다. 지금으로부터 2천6백여년전 인도 땅에서 태어난 싯다르타 태자가 6년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던 번뇌더미를 쓸어버려 위대한 승리자가 되었기 때문에 위대한 영웅, 즉 대웅(大雄)이라 한 것이다. 회의와 절망 아만과 질투 끝없는 욕망에 물든 중생들에게 새벽이슬 감로(甘露)의 가르침을 펴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향기가 언제나 머물러 있는 따스한 공간이 대웅전이다. 636년 백제무왕 37년 영은 조사 (靈隱祖師)가 이절을 영은사 라는 명칭으로 창건한 이래 역사 속에 부침을 계속하다가 1958년에 중수되었다.

 삼성각

삼성 신앙은 불교가 한국 사회에 토착화하면서 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와 합쳐져 생긴 신앙 형태이다. 전각은 보통 사찰 뒤쪽에 자리하며, 각 신앙의 존상과 탱화를 모신다. 삼성을 따로 모실 경우에는 산신각·독성각·칠성각 등의 전각 명칭을 붙인다. 삼성을 함께 모실 때는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을 짓고 따로 모실 때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을 짓는다.

산신(山神)은 한국의 토속신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선신으로 산신이라는 인격신과 화신인 호랑이로 나타난다. 인격신으로서의 산신은 나이 든 도사의 모습이고, 호랑이는 대부분 산에 위치한 사찰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옆면

 서래봉

 

 범종각. 범종, 운판, 법고, 목어 등사물이 있는곳이다.

 

 

 

 

 천왕문과 연못

 

 마지막으로 우화루.

문화재는 아니지만 내장산 단풍사진의 소재로 많이 쓰이는곳인데 올해는 이곳의 단풍도 많이 미흡했다. 

 2009년 7월 30일 내장사 입구에서 세계적인 포토클럽 매그넘의 회장이자 유명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 Abbas님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2년반전인데 저때만 해도 꽤 젊었던것 같다.

 

한겨레신문 매그넘 전회장  Abbas 인터뷰

사진기자가 인터뷰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자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란 출신 사진가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가 집단 매그넘의 전 회장까지

지낸 아바스(62·사진)는 평생 남을 찍어왔음에도 정작 자기 얼굴 전체가 사진에 나오는 건 꺼리는 사진가다. 실제 각종 자료에 나온 그의 얼굴 사진을 보면 손으로

동그랗게 카메라 렌즈 모양을 만들어 눈에 대거나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모습이 대부분이다. “제가 점잖은 사진가라서 그럽니다. 영화배우도 아니고, 공인도 아니

어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요. 사진작가는 카메라 뒤에 서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분은 수십년된 손때묻은 필름사진기로 멋진 작품을 남기는데 우리부부는 아직도 장비탓만 하고 있다.

다시한번 반성의 시간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