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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강화]병인양요때 조선왕실의궤가 약탈되었던 외규장각

by 柔淡 2011. 12. 6.

고려궁지에 아주 중요한 건물하나가 있는데 그게 외규장각이다.

지난 6월11일 프랑스로부터 약탈되었던 조선왕실의궤가 반환됨으로서 더욱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외규장각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으로, 왕립 도서관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 역할을 하였다. 설치 이후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를 비롯해 총 1,000여 권의 서적을 보관하였으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297권의 왕실의 주요행사를 기록한 의궤 191종(유일본 30종 포함)

297책을 포함한 도서 359점을 약탈했다. 나머지는 불에 타 없어졌다.

1975년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촉탁 직원으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가 도서관에 조선시대의 도서가 보관

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목록을 정리하여 그 존재가 알려졌다. 서울대학교는 1991년에 정부에 도서 191종

279권의 반환 추진을 요청하였고 1992년에 정부는 외규장각 도서목록을 프랑스에 전하여 도서 반환을

요청했다.

1993년 9월 한국·프랑스 정상회담에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경부고속철도부설권을 프랑스의 테제베

(TGV)가 따 내기 위한 의도로 《휘경원원소도감의궤》 1권을 가지고 와 외규장각 도서 반환의 의지가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외규장각 도서는 약속과 달리 반환되지 않았고 2000년 10월 다시 양국 정상회담

에서 한국에 필사본이 없는 63권을 '대등한 문화재 교환 전시' 형식으로 2001년까지 한국에 반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반환 협상이 연기되거나 프랑스 측에서 계속 협상을 지연시키는 등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국제사법재판소의 힘을 빌리더라도 무조건 반환시켜야 한다는 역사·학술·시민

단체의 외규장각 도서 반환운동이 확산되는 등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2010년 11월 12일 G20정상회의에서 양국의 대통령 간에 외규장각 도서를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임대형식으로 대여하기로 합의하였고, 2011년 6월 11일 145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출처] 외규장각 [外奎章閣 ] | 네이버 백과사전

 

그런데 역사적인 중요성에 비해 건물이 너무 왜소하고 전시물도 빈약해 보였다.

고려궁지 가까운 곳에 약탈당했던 역사적 사실과 프랑스에서 반환된 조선왕조 의궤를 전시하고 소개할 건물을

새로 만들어서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조선왕조의궤를 반환받는데는 국가보다는 한개인의 숨겨진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아쉽게도 그분이 한달전쯤 타계하셨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들을 반환받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재프랑스 서지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민재 박병선 박사가 22일(한국시간 23일) 프랑스에서 타계했다. 향년 83세.

정부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파리 한국문화원과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근처에 빈소를 마련하고 고인의 유골을 국립묘지(납골당)에 안장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정부는 생전의 박 박사와 유가족으로부터 고국에 묻히고 싶다는 의지를 확인했다. 국립묘지 안장이 확정되면 고인의 유해는 현지에서의 장례 절차를 마친 뒤 한국으로 온다. 이명박 대통령은 23일 프랑스에서 타계한 박 박사 유족에 조전을 보내 위로했다.

 

고인은 서울대 역사교육과 졸업 후 프랑스로 건너가 소르본대ㆍ고등교육원에서 역사학ㆍ종교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국립도서관(BNF)에서 사서로 일하던 1972년까지 세계 최초의 활자 인쇄본으로 알려졌던 구텐베르크의 성경책보다 78년이나 앞선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발견하고 한국 학자들의 무관심과 비판 속에서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임을 증명해내 '직지 대모'로 불렸다. 고인은 그 공로로 2007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또 1975년 도서관 별관에 있는 먼지투성이의 파손도서 창고에서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내 한국에 알리고 도서 반환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190종 297권인 외규장각 도서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2개월간 강화도 강화읍성에 주둔하면서 약탈해간 문화재 중 일부다. 녹색 표지에 문고리가 장식으로 달린 외규장각 도서는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고 국내에서도 보기 힘든 어람용(御覽用ㆍ왕이 보는 서책) 의궤(왕실에서 거행된 의례의 전모를 소상하게 기록한 서책)다.

고인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 프랑스 국립도서관장이 1980년 사표를 요구하자 사서 일을 그만두고 매일 도서관을 방문해 외규장각 도서를 열람하며 목차와 내용을 옮겼다. 그의 열정과 노력 덕분에 1992년 한국 정부가 직접 프랑스에 도서 반환을 요청하고 나섰고 결국 올 3월 약탈된 지 145년, 발견 33년 만에 대여 형식으로나마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고인은 그 공로로 올해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고인은 지난해 1월 국내에서 직장암 수술을 받은 뒤 10개월 만에 파리로 돌아가 병인양요 관련 저술 준비작업을 해왔지만 병세가 악화돼 올 8월 파리에서 재수술을 받은 뒤 요양해왔다. 그는 병석에서도 '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라는 제목의 외규장각 도서 약탈 과정 집필을 계속하다 생을 마감했다. 고인은 유언으로 준비 중이던 '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2편'의 저술을 마무리 지어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유족들은 전했다. 천주교 신자인 박 박사는 결혼을 하지 않아 직계가족은 없으며 1967년 발생한 동백림사건 이후 프랑스로 귀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