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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강화]조선시대의 불운한 왕 강화도령, 철종의 잠저였던 용흥궁

by 柔淡 2011. 12. 7.

조선왕조 500년간 27명의 왕이 있었는데 세종과 같은 성군도 있었지만 연산, 광해군 같은 폭군도

있었고 본의 아니게 왕위에 오른 강화도령 철종같은 왕도 있었다.

강화도령 철종이 살던 잠저를 새로 지은게 용흥궁이다. 웬만한 시골의 종택보다도 못한 집이지만

그래도 한때는 왕위에 올랏던 분이 거주했던 곳이라 궁이라 불리는 모양이다.

 

철종  

휘() 변(昪). 초명 원범(). 자 도승(). 호 대용재(). 전계대원군() 광()의

셋째 아들로, 조부는 장조(장헌세자)의 아들인 은언군이다. 비()는 철인왕후() 김씨()이다.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 명()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와 덕완군()에 책봉되었으며,

1849년 19세로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 후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1851년 대왕대비의 근친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를 삼았다. 문근은 국구()로서 정권을 장악, 안동 김씨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였다.

1852년부터 왕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정치에 어둡고, 김씨 일파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극심한 민생고를 유발, 경상도 진주(), 함경도 함흥(), 전라도 전주()

등지에서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속출하는 민란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려는 의욕조차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회정세에서 최제우()가 주창한 동학사상은 학정에 허덕이는 민중 속으로 놀라운 속도로

파급,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었으며, 만민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의 사상도 일반 민중은 물론 실세()

한 양반층에까지 침투되어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철종은 결국 재위 14년간 세도정치의 소용

돌이 속에서 여색에 빠져 정치를 바로잡지 못한 채 병사하였다. 능()은 예릉(:)이다. 
[출처] 철종 [哲宗 ] | 네이버 백과사전

 

철종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알아보면 

철종 이원범은 1831년(순조 31년) 음력 6월 17일 한성부 향교동(鄕校洞) 경행방(慶幸坊) 사제(私第)에서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의 아들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壙)과 용성부대부인

(龍城府大夫人) 파주 염씨(廉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은언군홍국영상계군정조의 후사로 추대하려던 사건과, 정조 사후 부인 송씨와

며느리인 신씨가 천주교를 비밀리에 신봉하던 것이 적발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당한다.

이후 순조는 이복동생 은언군을 살리려고 노력한 아버지 정조의 유지를 받아들여 은언군의 자녀들을 석방시키려

노력한다. 1817년 순조는 강화도 안에서 은언군 아들들의 집을 지어주는데 노론 대신들의 반발을 묵살하고 순조는

석방이 아니니 번거롭게굴지 말라면서 넘어간다.

1822년에는 위리안치형에서 형을 감형하여 은언군의 자식들의 집 주위의 가시울타리를 거두고, 혼인도 하게 해주어

일반 백성들처럼 살 수 있게하는 조치를 내린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반대 상소가 올라왔지만, 순조는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1830년 은언군의 자손들을 강화도에서 방면, 철종은 1831년 한성 경행방 사제에서 출생할수 있었다.

그러나 1836년 민진용의 옥사로 인해 그의 일족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당하게 된다.

 

아버지 이광은 본부인 최씨에게서 아들 회평군으로 추봉된 원경과 영평군 경응을 낳고, 후실 부인인 파주염씨에게서

원범을 얻었다. 1844년(헌종 10) 이복형 회평군(懷平君) 이명(李明)의 옥사로 인해 일가가 교동도(喬桐)로 유배되었

다가 곧 강화도로 옮겨졌으며, 기본적인 왕족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이후 이주한 철종의 가족은 강화도에 살았는데, 철종의 생가는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41 번지에 있다.[1][2] 원래는

초가였으나, 철종 4년(1853)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세우고 용흥궁이라 하였다.[2]

아버지 이광은 은언군의 서자인데다가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이 역모로 사사되었으므로 작위조차 없었다. 아버지

이광은 아들 철종이 왕위계승자로 내정된 뒤에야 전계군으로 추증되고, 다시 대원군으로 가증되는 형식으로 작위를 받았다.

 

철종의 애틋한 사랑.

강화도에서 농민과 행상으로 살던 그는 양순이라는 천민 처녀를 만나게 된다. 시골도령으로 자라다가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철종은 강화에서 살 때 양순과 혼약을 맺은 사이였다.[3] 하지만 천민은 궁녀조차 될 수 없는 엄격한 규범 때문에 양순을

궁궐로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양순을 잊지 못한 철종은 상사병을 앓는다. 그러자 왕가의 사람들은 양순을 은밀하게 죽여버린다.[3]

일설에는 그의 방탕한 생활과 죽음의 원인을 양순의 죽음에서 찾기도 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철종은 비탄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3]는 것이다.

 

잠저를 지키고 있는 단풍나무, 이 단풍나무 거목은 강화도령의 어린시절을 전부 지켜봤을 것이다.

용흥궁 입구

 

 

 

 

 

 

 

 

 

 

 

 

 

 

 

 

 

 

 

강화나들길

2009년부터 조성된 강화나들길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세계적인 갯벌, 세계문화유산인 선사시대 고인돌, 고려시대 왕릉, 조선시대 진지를 볼 수 있는 8개 코스다.

2009년 3월 시작된 이 사업은 2013년 목표로 개설될 20개 코스 중 11개 코스 237km를 완성한 상태다. 이들 코스는 100여 개 마을을 잇는 옛길인 ‘화남길’ 400km, 돈대 등 해안가 국방유적을 돌아보는 ‘돈대길’ 100km, 유적지를 찾아갈 수 있는 ‘역사문화탐방길’ 20km, 휴전선 북한 땅을 바라볼 수 있는 ‘평화생명길’ 40km 등 4개 구간으로 나뉜다.

그 첫번째 코스가 용흥궁 공원에서 시작하는데 고려시대의 임시수도로서 도서지역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강화산성, 고려궁지 , 용흥궁, 강화성공회한옥성당과 아늑한 대산마을 벌판을 보며 연미정으로 가는 길은 옛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고향같은 길이다.

 

 

역사문화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많은 사랑을 받고있고 이날도 많은 분들이 나들길 여기저기를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