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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강화]우리역사의 축소판, 강화의 국방유적 둘러보기 1 - 갑곶돈대

by 柔淡 2011. 12. 8.

고려궁지, 용흥궁, 성공회 강화성당 등 현재의 강화군청이 있는 관청리의 유적을 돌아보고

이제는 처음 목적대로 강화도의 국방유적을 둘러보는 시간이다.

강화도에는 수많은 국방유적이 남아있는데 그이유를 알려면 강화도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화도는 삼국시대에서부터 백제·고구려의 중요한 요충지로서 자리잡아왔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의 최대 격전지로 생각되는 관미성이 강화군 교동도로 추정될 정도 강화도는 큰 위치를 차지

하고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 개로왕이 죽고 수도인 한성이 함락되었는데, 이로써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고, 강화도 또한 이때 고구려에 귀속되었으며, 당시 군

이름은 穴口(혈구) 혹은 甲比古次(갑비고차)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접 교동도는 고구려의 高木根縣

(고목근현)이 되었다.

그 후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한강 유역을 되찾았고, 다시 신라의 영역을 들어가게 되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풍부한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을 확보하여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때 강화는 海口郡 또는 穴口鎭이라 했다.

 

강화도는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우리 민족사에서 잊지 못할 항쟁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고려는 1231년에 몽고의 침략을 당했고, 다음해인 1232년 고종은 왕실 귀족을 비롯한 조정관료들과 함께

모두 강화로 천도하였다. 그 후 강화도는 1270년에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 몽고군과 대치하면서

나라를 지킨 투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때부터 강화를 江都로 불렀으며, 지금도 강화도에는 고려시대

별도인 강도의 왕궁터가 남아 있고 몽고와 항쟁하던 흔적들도 성곽 곳곳에 남아 있다.

한편 고려 무인 정권의 군사적 배경이 되어 몽고와 항쟁해 왔던 三別抄는 개경 환도가 알려지자 즉시 대항

하고 나섰다. 그들은 배중손을 중심으로 개경 정부와 대립하는 새로운 항몽 정권을 수립하였으나 곧 진도로

남하하고 말았다.

고려가 몽고와 항쟁하는 와중에서 남긴 가장 훌륭한 업적이라면 팔만 대장경을 조판하였던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당시의 조판을 진행했던 장소와 그 경과를 정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이 있다.

한편 고려 청자를 비롯한 고려시대의 보물들도 이곳 강화도에서 출토된 것이 많은데, 고려 청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국보 제133호 靑瓷辰沙蓮花紋瓢注子(청청자진사연화문표주자)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은 일제시대 강화도의 최충헌 묘에서 도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고려시대 강화도에서는 남쪽 마니산 정상에 참성단을 다시 쌓아 하늘과 단군에 제사지냈다. 이는 우리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국난을 당해 나라를 지키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조선시대 1627년 금나라 3만 군사의 침입을 받은 인조는 평복 차림으로 강화로 피신하여 100일 동안을 머무른

적이 있는데 이 사건이 바로 丁卯胡亂이다. 1636년 청나라 태종이 쳐들어왔을 때는 인조가 미처 강화로 피란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퇴각했는데, 강화가 청에게 넘어가고 봉림대군과 빈궁 및 여러 대신등 200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자 항복하고 말았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이때 강화도는 종묘 사직을 지키기 위한 背都가 되어 留守와 經歷을 갖추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뒤 효종은 인조 때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계획하고 강화 해안에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광성보, 인화보,

승천보 등과 같은 방어시설을 새로 쌓거나 고쳤다. 그리고 숙종은 강화도 해안 전역의 돌출부에 큰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작은 톱니바퀴 모양으로 53개(2개는 얼마뒤에 폐지되었다)의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강화도 전지역을 요새화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서양 세력이 조선을 넘보기 시작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먼저 항강 어귀 강화에까지 쳐들어온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를 침략한 신미양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때마다 강화의 백성들은 외세에 대항하여 번번이 나라를

구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875년 일본 군함이 강화에 침입하여 이른바 운양호사건을 일으켰고, 다음해(1876년)에 강화도 조약이

강요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병자수호조약이다. 그로부터 35년 뒤인 1910년 조선은 일본에 의해 완전히 병합되고 말았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강화도에 당연히 외세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시설이 준비된 것은 당여한 일이라 하겠다.

그중 첫번째로 찾은곳이 갑곶돈대다.

 

갑곶돈은 구강화대교 입구 부근으로 추정된다. 주변에 면석으로 추정되는 석재가 간간이 보인다. 이 돈대 하부는 암반으로 되어 있어 돈대 설치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북쪽으로는 갑곶나루가 위치하고 있어서 김포의 문수산성과 통할 수 있는 통로로서 활용되어 왔으나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이 돈대는 고려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후 조선 인조22년(1644)에 설치된 제물진(갑곶진)에 소속된 이 돈대는 숙종 5년 (1679)에 죽조 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7일 병인양요시 프랑스 극동함대가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산성, 문수산성등을 점령하였다. 동년 10월13일 프랑스군은 삼랑성(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 패해 패주 하였다. 이때 강화성 내에 있던 강화동종을 가져가려 하였으나 무거워 가져가지 못하고 성내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등을 약탈하고 조선궁전 건물은 불 질렀다. - 갑곶돈대 내에는 조선시대의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