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공주]명재 윤증, 백의로 조선을 경영하다 1 - 충청남도역사박물관 특별전시회

by 柔淡 2012. 5. 29.

박물관 1층에 들어가니 윤증가에서 기탁한 1만2천여점의 유물중 명재 윤증과 관련된 유물만

다로 선별해서 :명재 윤증 백의로 조선을  경영하다" 라는 특별전을 열고 있었다.

보물과 중요 민속자료 등이 많았는데  명재 ‘윤증 초상’ 5점 및 영당기적 (보물 제1495호)과 
‘윤증가의 유품’ 54점 (중요민속자료 제22호) 등이 중요한 유물이었다.

 


윤증(尹拯, 1629~1714)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峯)이다.

아버지인 윤선거(尹宣擧)에게 사사받았고, 이후 유계(兪棨), 송준길(宋浚吉), 송시열의 3대 사문(師門)에

들어가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는 당대의 정통유학을 수학하면서 박세당(朴世堂)·박세채 등과 교유하여

학문을 대성하였다. 특히 송시열의 문하에서는 많은 문인들 중 유독 뛰어나 고제(高弟)로 지목되었고,

서인계 정통으로서는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체득하였다.

 

1663년(현종 4)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였으며, 이듬해 내시교관에 제수되고 이로부터

사헌부 지평, 호조참의, 대사헌, 우참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1700년(숙종 26)에는 우의정을 제수하고 사관을 보내어 임명장을 전했으나 14번의 상소를 올린 끝에 사양하였다.

1714년 윤증이 세상을 떠나자 숙종은 시를 지어 애도하기를,  


                   유림에서 그의 도덕을 칭송했으며    儒林尊道德

                   나 역시 그대를 흠모했소               小子亦嘗欽

                   평생에 얼굴 한번 대한 일 없기에    平生不識面

                   아쉬운 마음 더욱 간절하구려         沒日恨彌深


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군왕의 얼굴을 보지 않고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른 사람은 오직 명재 윤증 뿐이었다고

하여 세간에서는 그를 ‘백의정승’이라 불렀다.

윤증은 소론의 영수로서 송시열의 주자학적 조화론과 의리론만으로는 변모하는 정국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비판

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그를 따르던 소론 진보세력들에 의해 꾸준히 전승 발전되어 노론일당 전제체제 하에서

비판 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평소에 쓰던 물건들

 

 

 

 

 

 

임금이 직접내렸다는 현판

 

 

 

 

 

 

 

 

 

 

 

 

 

 

 

 

 

 

 

 

 

 

 

 

 

 

배너 위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