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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논산]금강변의 명당에 자리잡은 유교 문화유적 임리정, 팔괘정, 죽림서원

by 柔淡 2012. 6. 20.

강경 덕유정에서 나와 금강변의 서원과 정자를 찾아 나섰다.

강경 황산리는 금강변에 위치한 해발 10~20m 정도의 구릉이 위치한 풍광이 아름다운 마을인데

이곳에 조선 기호유학의 거장인 김장생과 송시열이 후학들을 가르친 정자와 그들을 배향한 서원이

줄지어 있었다.

 

‘충절과 선비의 고장’, ‘양반의 고장’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충청도, 그 이미지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충청 지역을 대표하고 있으며 강한 상징성을 띠고 있다. 그러한 상징의 연원은 조선시대 가장 오랜 기간

정권을 잡고 있었던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존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중심에 논산에서 뿌리내린

호서 사족의 활약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 이는 기호 유학을 이야기할 때 기본적으로 논산의 사족과 이곳

에서 만개한 유학을 살피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조선 중기 충청도 사족들의 학맥은 대부분 논산 출신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그의 아들 신독재

(愼獨齋) 김집(金集)과 연을 맺고 있었다. 김장생은 아버지인 김계휘(金繼輝)가 강학했던 정회당과 자신이

세운 양성당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대표적인 제자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초려 이유태, 탄옹 권시, 장유, 최명길, 신흠, 이경석 등 실로 그

이름을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다. 기호 사림에 종속되어 별다른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던 충청도의 호서사림은 김장생의 출현으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그 중심이 김장생의 근거지였던 논산이었다.

그중 가장 먼저 보이는것은 죽림서원이지만 오래된 순으로 따지면 임리정이 우선이기에 임리정, 팔괘정,

죽림서원 순으로 소개를 한다.

 

 임리정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건립하여 후학들에게 강학하던 곳으로 원래는 황산정(黃山亭)

이라고 하였으나, 임리정기비(臨履亭記碑)에 의하면 『시경』의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못에 임하는 것같이

하며 엷은 어름을 밟는 것같이 하라”는 구절을 따라 임리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임리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은 기둥 사이를 동일한 간격으로 나누고, 그중 왼쪽의 2칸을

마루로 깔아 대청으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온돌방 전면에는 반 칸을 안으로 들여 상부는 누마루로,

하부는 함실아궁이로 만들었다. 기둥은 둥근기둥이고 그 위에 기둥머리를 배치하였고, 초익공식 공포를 올렸다.

창방 위에는 기둥 사이마다 5개의 소로 받침을 두고 주심도리를 받치고 있다. 지붕의 가구 방식은 앞뒤 평기둥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기둥머리를 갖춘 낮은 동자주를 세워서 종량을 받쳤고, 그 위에는 제형대공이 배치된 겹처마집이다.

앞마당에는 1875년(고종 12)에 세워진 임리정기비가 있는데, 비문은 김상현(金尙鉉)이 찬하고 김영목(金永穆)이 서하였다.

현재는 비각 안에 보호되어 있다.

임리정은 1976년 6월 9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변에 임리정 중수 및 개수 등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건물의 초석용 석재가 여러 개 흩어져 있고,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5호인 죽림서원이 옆에 있다.

임리정

 죽림서원에서 임리정으로 오르는길

 

 

 

 

 임리정에서 내려다 본 죽림서원

 임리정 언덕에서 내려다본 금강풍경. 예전에는 황산나루터였다.

 임리정비

 

 

 논산지역 최초의 학교터

 

 임리정에서 바라본 팔괘정, 전망대 아래 나무에 가려있다.

 


다음은 팔괘정이다.

1663년(현종 4) 송시열이 스승인 김장생임이정을 짓고 강학을 시작하자 스승과 가까운 곳에 있고 싶은 마음에 팔괘정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당대의 학자 및 제자들을 강학하였던 장소로 전해지는 팔괘정죽림서원의 북쪽 언덕에 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마치 죽림서원의 양 날개처럼

사우를 위요하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1695년(숙종 21) 송시열죽림서원에 배향되자 죽림서원의 부속 건물이 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관청의 소유가 되고, 대지는 일본인에게 넘어가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아 극도로 퇴락하였다. 해방 후 1948년 죽림서원 유림들의 발의로 대지를 돌려받았고, 1949년 송시열의 본손인 송재성(宋在晟)

유림의 협조로 말끔히 중수하고 기문을 지어 걸었다.

건물은 앞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방바닥은 누마루형을 취하고 있는데, 정면에서 볼 때 왼쪽의 2칸에는 통간으로 대청마루를 만들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다. 조선시대 정자 건축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 한식 가옥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정자의 내부에 시액 현판이 걸려 있고, 팔괘정 주변으로는 건물의 초석으로 보이는 석재가 흩어져 있다. 건물 뒤편 북쪽의 바위에는 송시열이 각자했다고

전하는 ‘청초안(靑草岸)’, ‘몽괘벽(夢挂壁)’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1978년 3월 31일에 충청남도에서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하였다


죽림서원에서 팔괘정으로 가는길

 

 팔괘정

 

 

 팔고ㅐ정에서 내려다 본 금강풍경

 

 해설해주시는 유제협 논산문화원장님 

 송시열이 각자했다는 청초안, 몽괘벽

 

 

 

 

 

 

 멀리 금강변에 또다른 정자가 보인다. 옥녀봉 공원인데  물이 맑아 옥황상제의 딸이 내려와 목욕을 하던중 갑자기 하늘에서 올라오라고 재촉했다.

급한 나머지 앞가슴을 내놓고 올라오는 딸을 보고 화가 난 옥황상제는 딸에게 거울 하나만 주고 땅에 살게했다.옥녀는 슬픈 나머지 울다 지상에서

죽게 되었는데, 묘처럼 봉우리가 생겨 이곳을 옥녀봉이라고 부르고, 거울은 바위로 변하여 용영대가 되었다고 한다.

 

 

 

 

 

 팔괘정에서 옥녀봉방향으로 계단을 내려가면 요즈음 은교라는 영화로 한층 유명세를 타고 있는 박범신작가의 문학비가 서있다.

 강경출신의 박범신 소설가는 자신의 살아있는 동안 이런 기념비를 만드는것을 매우 반대했다는데 강경주민들이 작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강경주민들으르 위해 이비를 세운다니까 마지못해 허락했다고 한다. 

 

다음은 죽림서원이다.

죽림서원은 1626년(인조 4)에 세워졌다. 1663년(현종 4)에 중건하였으며 그로부터 2년 뒤인 1665년 사액되었다. 본래 창건 때에는 지명을 따서

황산서원(黃山書院)이라 하였다. 또한 서원에 제향된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의 6인이 모두 문묘(文廟)에 배향된 유현(儒賢)이라

하여 육현서원(六賢書院)이라 부르기도 했다.

죽림서원의 창건에 최초 발의하고 건의한 인물들은 김장생의 문인인 최명룡, 송흥주 등이었다. 이들이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황산사(黃山祠)죽림서원의 기원이다. 황산사는 후에 황산서원이라 불리다가 1665년 사액이 되면서 죽림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871년(고종 8) 서원 훼철령이 내려졌을 때 철폐되었는데, 해방 후 1946년 지방 유림들에 의해 단소(壇所)가 설치되고 1965년 사우를

복원하였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에서 문화재자료 제75호로 지정하였다.

죽림서원의 앞면은 평지로 이루어졌고, 배면에 약한 구릉을 배경으로 배치되어 있다. 작은 마당을 두고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으며, 마당을 지나

안으로 진입하면 낮게 한 단을 조성하여 신문(神門)을 두었고, 사우인 죽림사가 위치해 있다. 죽림사(竹林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앞면 열은 퇴칸이고,

뒷면 열은 내부 공간으로 꾸몄다. 이곳에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사계 김장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고주 5량가 구조에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측면에는

풍판을 달아 두었다.

강학 공간의 동·서 양재는 마주보고 있어 형태가 다른 서원들과는 다르다. 보통 양재는 수평, 수직을 맞춰 대면하고 있는데, 이곳은 서재가 사선으로 틀어진

채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고종 때 훼철당한 뒤, 후에 복원하면서 대지의 조건에 따라 배치하려다 현재의 형태가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배치 형태가

질서 정연하지 못하다. 사우의 앞면 좌우측에는 공적비와 중건비 등이 세워져 있으나 좌대만 남아 있는 것도 있다.

헌장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앞면 열은 퇴간이고, 뒷면 열은 온돌방을 두었다. 1고주 5량가 구조로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측면에는 박공으로 처리를 하였다.

서재는 수직사를 겸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외삼문 쪽 1칸은 부엌, 나머지 2칸은 온돌방이다. 1고주 5량가 구조로 홑처마 우진각 지붕이다.

기둥머리는 민도리집 구조이다.

충청남도 남부 공주목에 속하였던 논산은 거의 서인계, 또는 노론계의 일색이었는데 죽림서원의 경우 영남학파인 조광조이황, 기호학파의 거유인 노·소론의

이이성혼, 노론의 조종(祖宗)인 김장생송시열이 함께 제향되어 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이황이 어떠한 연유로 서인 및 노론의 대표 인물들과 함께

제향될 수 있었는지 좀 더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내부는 들어가 볼수 없었다.

 

 

 

  

 

 

계룡대에 10여년을 살았지만 가까운 논산에 이런 중요한 유적들이 남아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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