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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논산]조선시대 한장소에서 46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한 최고의 사학, 파평윤씨 종학당

by 柔淡 2012. 6. 21.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오바마 미국대통령이  몇번씩이나 언급할정도로 세계에서 최고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런 교육열이 최근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400여년전 조선시대부터 생겨나고 실제로 교육이

이루어 졌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수 없다.

 

논산 노성에 있는 파평윤씨의 종학당이 바로 그곳이다.

파평윤씨 종학당은 1997년 12월 23일에 충청남도에서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지정하였다. 창건 후 약 370여

년간 많은 인재를 배출한 학문의 요람으로 노성 파평윤씨 가문의 문과 급제자 46인의 대다수가 이곳 출신이

었다고 전해진다.

한 장소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과거에 40여 명 이상 배출된 것은 조선 600년 역사에서 없던 일이다.

파평윤씨 종학당파평윤씨 문중에서 수백 년간 운영해 오던 서당으로, 종중의 자제와 문중의 내외척, 처가의

자제들까지 합숙, 교육시키기 위해 1643년(인조 21) 윤순거가 건립한 교육 도장이다. 건립 당시 윤순거파평

윤씨 문중 자제의 교육 기틀을 마련하기 위하여 종제 윤원거, 아우 윤선거와 함께 종약 및 가훈을 제정하고,

파평윤씨 종학당을 건립했다. 또한 책, 기물, 재산 등을 마련하고 윤순거 자신이 초대 당장이 되어 초창기 학사

운영의 기반을 닦았다. 1910년 한일합병 전까지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신교육의 도입으로 폐쇄되고 말았다.

파평윤씨 종학당의 전신은 현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50m 거리에 있는 파평윤씨 정수루이다. 파평윤씨 정수루

누각과 서재가 있어 선비들이 학문을 토론하며 시문을 짓던 장소였다. 파평윤씨 정수루 정면 중앙에는 정수루

(淨水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좌우로 향원익청(香遠益淸), 오가백록(吾家白鹿)이란 현판이 각각 걸려 있다.

파평윤씨 종학당은 동향에 가까운 동남향으로 서 있으며 주변은 담을 둘러 구획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평면은 가운데 1칸통은 대청마루로 삼고, 양쪽에는 각각 온돌방을 두었다.

서쪽 온돌방 뒷면 벽은 아래를 띄운 반침을 달았다.

앞면 열은 툇간으로 처리하여 1고주 5량가 구조이다. 양 측면의 온돌방 앞마루는 가운데 대청마루보다 1자 정도

높였다. 앞면의 기단(基壇)은 자연석 바른층쌓기로 3자 정도로 높였고, 가운데에 계단을 두었다. 초석은 커다란

막돌 덤벙주초를 놓았고, 기둥은 방주를 썼으며, 기둥 부재는 약 6치 각으로 그리 견실하지는 않다.

대청마루 앞면에는 창호를 달지 않았고, 온돌방 앞면에는 띠살분합문을 달았다. 온돌방 측면과 툇마루 측면,

그리고 대청 뒷면에는 골판분합문을 달았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에는 3분합 문 열개를 달아 필요에 따라 방과

대청을 터서 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종학당 입구

 정수루 

 

 

 

 좌측에 오가백록

 우측에 향원익청

 

 정수루와 백록당의 입구

 

 

 좌측이 백록당, 우측이 정수루다.

 

 학생들이 많을때는 여기 백록당에서 공부 했다는데 고조도 상당히 과학적이다. 독자적인 공부를 장려하기위해 요즈음 원룸같은 형식이고

중앙에 복도가 있다

 

연못아래 기와집에 종학당 현판이 걸려있다. 정수루에서 내려다본 전경

 

 

  멀리 좀전에 보았던 파평윤씨 재실과 묘소가 보인다.

훌륭한 선조들의 묘소를 보면서 공주에 열중했을 파평윤씨 후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정수루

 

 

 

 

 

 

 보인당

 

 

 

 

 

 

좋게 보면 조선시대 최고의 가문으로 꼽히는 파평윤씨 집안의 대단한 교육열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고

좀 다르게 보면 사농공상이라는 구시대의 사고방식에 얽매여서 과거급제를 위해 집안의 어린이들을 혹독하게 교육시켰던

현대판 기숙학원 같은곳이다. 오로지 과거에 급제하는것만이 최상의 가치였던 조선시대의 한 단면이라 할수 있겠다. 

 

다시한번 정리하면
16세기 중반에 니산(노성)에 터를 잡은 파평윤씨 일가가 빠른 시일 내에 조선의 명문가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바로 종학당의 문중 교육에 힘입은 바 컸다고 할 수 있다.

종학당의 역사는 1624년 인평대군의 사부였던 윤순거가 병사 재실에서 종학의 기틀을 마련한 데서 비롯되었다. 1628년 어간에는 현재의 위치에 백록당(白鹿堂)정수루(淨水樓), 그리고 승방인 정수암(淨水庵) 등 세 채의 건물을 지어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종학에는 각종의 책자, 기물 등이 구비되었고 윤순거가 초대 당장으로 진력하였다. 이곳은 과거 준비는 물론 강학과 학문토론의 장소로 이용되었고, 특히 교육은 일반 서원이나 서당과 달리 파평윤씨 종학(宗學)의 규칙과 규율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종학당의 교육이념과 체계는 1645년에 만들어진 파평윤씨 노종파 종약(宗約)과 윤증이 1680년과 1701년에 각각 만들어 현재 종학당에 걸려 있는 「초학화일지도(初學畵一之圖)」「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를 통하여 상세히 엿볼 수 있다. 종학의 전통은 윤증 때 이르러 더욱 활발하게 운영되었는데, 당시까지는 주로 병사와 정수암이 주요 거접처로 활용되었고 독립된 서당으로서의 건물을 갖춘 것은 유봉 영당에 건립된 1817년의 종학당이 단초가 된다.

이후 현재의 위치로 이건, 규모를 일신하게 된 것은 1829년 과천공 윤정규 등에 의해서였다. 이때 반호(盤湖) 윤광안(尹光顏)종학당 재건의 건축 자재와 400여 권의 서책, 그리고 200석의 전답을 출연하였고, 이를 계기로 1829년 그의 4종질 과천공(果川公) 윤정규(尹正圭)가 4칸 전후퇴의 건물을 마련함으로써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853년과 1893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1915년 대화재로 백록당정수루 일부가 불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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