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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순창]하서 김인후, 송강 정철, 우암 송시열 등의 학문적 자취가 어려있는 호남유학의 성지, 훈몽재

by 柔淡 2012. 7. 12.

하서 김인후의 발자취가 어려있는 낙덕정에서 차로 10분쯤 가면 훈몽재라는 호남유학의 도장이 있다.

훈몽재는 조선초기의 학자인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선생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명종 3년(1548년)에

지은 것으로 원래의 이름은 훈가(訓家)였다. 훈몽은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김인후는 윤원형(尹元衡)과

윤임(尹任) 사이의 권력 싸움으로 야기된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 관직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후학을

가르쳤다.


그 후 송강 정철(松江 鄭澈), 금강 기효련(錦江 奇孝鍊), 월계 조희문(月溪 趙希文) 등이 이 훈몽재에서 학문을

연마하였고, 우암 송시열(尤巖 宋時烈) 선생은 여기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훈몽재는 한국전쟁 때 불 타버리고

그 후 순창의 유림들이 그 자리에 어암서원 유허비(魚巖書院 遺墟碑)를 세워 김인후의 유지를 받들었다. 

 


대학암은 하서(河書) 김인후(金麟厚)와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대학"을 논하던 곳이다. 정철은 이곳에서 "대학"

을 통달하였다고 전한다. 바위 정면에 대학암(大學巖)이라는 정철의 친필이 음각(陰刻)되어 있다.  정철은 김인후가

후학들을 지도하기 위해 세운 훈몽재(訓蒙齋)에서 13살 때까지 공부하면서 틈틈이 대학암에 앉아 『대학(大學)』을

읽었다고 한다. 정철은 우리나라 가사(歌詞)문학의 제 1인자로 불리며, 전남 담양에도 그의 자취가 남아 있다.

 

관동별곡을 지은 정철이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가 학교다날때 배웠던 다음과 같은 김인후의

시조도 유명한 것으로 보아 그 스승에 그 제자가 아닌가 한다.

 

하서 김인후(1510~1560)는 16세기 호남 도학을 대표하는 도학자로서 정조대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전남 장성 태생으로

어릴적 부터 시재가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고, 성균관에서 퇴계를 만나 서로 끊임없이 토론 탁마했다. 문과에 급제, 34세

때인(중종대) 세자를 가르쳤다. 큰 기대와 정성으로 계도한 세자는 인종으로 즉위하지만, 얼마 되지않아 인종이 승하하고,

뒤이어 을사사화가 몰아치자 낙향하여 처사로 지내며 생을 마감했다.

 

하서의 시는 기본적으로 도학자로서 온유돈후한 시풍을 바탕으로 절제와 조화의 미를 갖춘 시들이 많지만, 현실적인

좌절과 불만을 광달하게 분출하여 한시 일반에서 감지하기 힘든 유별난 흥취의 미가 담긴 시들 또한 적지 않다.

그의 시는 타고난 천성과 당시의 사회적 모순이 서로 상승 작용하여 만들어진 독특한 문학세계라 할 수 있다. 

 -신호열 역주 <하서시선>에서-

靑山도 절로절로 綠水도 절로절로

山절로 水절로하니 山水間에 나도절로

그 中에 절로 난 몸이니 늙기조차 절로 하리.

  

훈몽재 전경 

 

 

 

 

 

 

 

 

 

 

 

 

 

 

 

 

 

양정관

 

 

 

 

 

 

정철의 친필, 대학암

 

 

 

 

 

 

 

 

뒤에는 백방산이 있고 앞으로는 추령천이 흐르는데 전 그 시기에는 더욱 아름다웠을것 같다.

그리고 6.25때 소실되지 않았다면 호남유학 최고의 성지로 추앙 받았을것 같은데 아쉽게도 소실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되는 바람에 그리 큰 조명을

받지 못한것 같다. 앞으로 잘 가꾸고 전통을 계승하여 호남유학 성지로서의 전통을 이어가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