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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우리나라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2 - 강학/제향영역

by 柔淡 2012. 7. 24.

소나무숲이 울창한 진입영역을 돌아보고 이제 강학영역과 제향영역을 둘러볼 차례다.

 

전각의 배치

지도문(志道門)이라는 정문을 들어서면 강학당이 남향으로 바로 자리잡고 있다. 강학당 바로 북쪽에는 一자

모양의 일신 · 직방재(日信 · 直方齋:공부하는 선비들의 처소)가 남향으로 자리하여, 강학당의 중심축(軸)과

양재(兩齋:동서재)의 중심축이 직교(直交)되게 되어 있다. 공부하는 처소와 관계되는 전각(殿閣)은 강학당 ·

동-서재말고도 학구재(學求齋) ·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학구재 · 지락재는 강당과 동서재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책을 간직하는 서고(書庫)와 제향때 제수(祭需)를 차리는 전사청(典祀廳)은 동서재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사당(文成公廟)은 강당의 서북쪽(동서재의 서쪽) 영귀봉 아래에 따로 베푼 담장안에 남향으로 자리해 있어, 한층

외지고 조용하다. 정문밖 왼쪽에 경렴정(景濂亭)이 있고, 동서재 뒷편에는 회헌 영정이며, 공자와 그 제자의 전

좌도(殿 座圖) 등 귀중한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새로 지은 영정각이 있으며, 그 북쪽 담장 너머에는 관리사인

고직사가 있다.

 

강학당(講學堂)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장대석 바른층쌓기의 높은 기단위에 주추를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기둥 웃몸은

창방(昌防)으로 결구하고, 기둥위에 주두를 놓고 쇠혀를 하나 내어, 이들을 서로 결구한 초익공(初翼工)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주두위에 놓인 대들보의 보뺄목은 일부에선 사면(斜面)으로 끊겼으나, 방(枋)을 둔 곳에서는 초각하여 둥글게

처리했다. 대들보를 전후 平柱위에 놓고, 대들보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중보(中樑)를 받치고, 그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고, 종도리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크기의 대청은 우물 바루바닥에 연동 천장을 이루었고,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 뒷면엔 한칸의 마루방을 달았다. 그리고, 강당 사방 둘레엔 반칸폭의 툇마루를 깔았다. 처마는 겹처마,

추녀는 활주로써 받치고 있다.

 

 소수서원 정문 지도문

 배치도

 

 강학당

 

 

 

 명종이 친필로 하사한 소수서원 편액

 

 

 

 사당(文成公廟)

사당에는 회헌을 주향(主享)으로,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 ·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 · 문민공(文敏公) 주세붕(周世鵬)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어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되어 있다.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위에 둥글게 주좌(柱座)를 쇠시리한 주춧돌에 배흘림 형태의 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운두가 낮은 주두(柱頭)를 놓고, 기둥머리에 도리방향으로는 밑면에 초각(草刻)한 첨차(?遮)를 내어, 그 위에 소로(小爐)를 놓아, 주심(柱心)도리의 장여를 받치고, 보(樑)방향으로는 그 끝에 날카로운 쇠혀(牛舌)를 내고 안쪽으로는 보아지 모양을 하여, 퇴간(退間)의 보를 받치게 된 초익공(初翼工)식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架構)는 1고주오량가(一高柱五梁家)이다. 앞면을 퇴간으로 개방했기 때문에, 대들보는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平柱에 걸고, 첨차대공(?遮臺工)을 놓아 마루보(宗樑)를 받치며, 그 위에 판대공을 세워 종(宗)도리를 떠받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막새기와를 사용했다.

 장서각

 전사청

  

 

 

 

 

 

 

 

 국보인 안향영정

 

 왼쪽 초상화가 소수서원을 건립한 주세붕이다.

 

 동·서재(東 · 西齋)

동재는 일신재(日新齋), 서재는 직방재(直方齋)로, 양재가 한 채(棟)로 되어있다. 평면은 정면 6칸, 측면 1칸반, 기단은 앞면은 다듬은 장대석을 바른층쌓기로 했고 후면은 거칠게 다듬은 네모진 돌로 바른층쌓기 했다. 건물 중앙에 정면 2칸, 측면 1칸반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각각 정면 2칸, 측면 1칸의 온돌방을 두고 방 앞엔 각각 반칸폭의 툇마루를 두었다. 주추는 막돌, 모난 기둥인데, 양쪽 온돌방 앞 두 개씩의 기둥과 뒷면 양쪽 우주(隅柱)만이 두리기둥이다. 기둥에는 굽면이 사면(斜面)이고 굽받침이 없는 주두(柱頭)를 놓고, 첨차( 遮)로 결구했는데, 첨차의 모양은 매우 단순하다. 특히 뒷면 우주에는 기둥 웃몸에서 헛첨차모양으로 돌출했는데, 건물쪽으로는 첨차모양을 갖추어 헛첨차모양을 이루나, 건물밖으로는 단순한 직선부재(副材)로서 보아지 형식을 이루고 있음이 주목된다는 전문가의 말이다. 가구는 오량(五梁)이다. 대들보를 平柱위에 걸고, 그 위에 간결한 동자기둥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홋처마, 팔작지붕이나 지붕높이가 낮아 합각면이 적음으로써 웅장한 멋이 적은 편이다.

 

서재인 직방재

 동재인 일신재

 

 지락재(至樂齋)

동 · 서재와 학구재(學求齋)의 동편에 서향으로 자리했다. 막돌 허튼층쌓기의 낮은 기단에, 정면 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 북쪽 끝칸을 온돌방으로, 나머지 두칸은 개방된 마루로 꾸며져 있다. 이는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豊基군수(광해5년,1613년 부임, 이듬해 이임)로 있으면서 세웠다 한다.

 학구재(學求齋)

동서재(東 · 西齋)의 동쪽 조금 뒷편에 동남향으로 자리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막돌 허튼층쌓기의 낮은 기단(基壇)이다. 가운데 칸은 개방된 마루를 깔고 좌우에는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신재(주세붕)의 문인 송간(松澗) 황응규(黃應奎)가 세웠다 한다.

 

 

 

 

 

 서원이나 향교에는 늘 오랜된 은행나무가 서있다.

 

 서원 관리인들이 사는 고직사

 

 

그동안 보수를 하였겠지만 1543년에 세운 건물들이 500여년 조금 못미친 지금까지 이렇게 잘 보존 되고 있다는게 자랑스럽다.

다음은 죽계천 건너편에 있는 취한재와 경자바위를 둘러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