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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영주]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부석사 2

by 柔淡 2012. 7. 27.

이제 브석사의 멋진 건물들과 석탑들을 만나볼 차례다.

 

일주문부터 지금 보이는 범종루까지는 새로 건축한 건물도 있고 손을 댄 흔적도 많아 그리 감동을 주지 않지만

이 범종루부터 나타나는 모든 건물과 석탑들은 너무도 아름다워 문화재에 대해 잘 모르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대부분 국보, 아니면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절집 한곳에 국보 5점, 보물 6점과 기타 다수의 문화재가 있는곳이 어디에 또 있으랴?  

 

부석사에는 2개의 누각이 있는데 안양루와 범종루다. 문의 성격을 겸한 안양루가 석축 위에 작고 날아갈 듯하게

지은 누각이라면 대석축단과 안양루 석축으로 구분되는 공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범종각은 지반에 견고하게

버티고 선 안정감 있는 건물이다. 특히 이 범종루는 그 건물의 방향이 여느 건물과는 달리 측면으로 앉아있다.

건물의 지붕은 한쪽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팔작지붕을 한 쪽이 정면을 향하고 있고 맞배지붕이 뒤쪽을 향하고 있는데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면 왜 목수가

지붕을 그리했는지를 알수 있으며 그 지혜에 절로 감탄이 난다

 

정면의 팔작지붕

부석사가 소백산맥을 향하여 날아갈 듯이 앉아있는데 범종루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면 건물이 전반적으로 무거워보인다.

따라서 범종루를 옆으로 앉혀놓고 뒷쪽을 맞배로 처리하여 건물이 전반적으로 비상하는 느낌을 주고 답답해 보이지 않아 좋다.

 

 

후면의 맞배지붕

 

안양루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외부 공간은 확장되어 다가온다.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안쪽에는 들어갈수가 없다.

 

 

 

국보 제 117호 부석사 석등 

부석사 석등은 無量壽殿 중심 앞 中庭 중앙에 세워져 있다. 따라서 무량수전을 진입하기 위해 安養樓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있다.

또한 석등 앞에는 석등의 부속물인 방형의 拜禮石이 현존한다. 이들 석등은 배례석이 있는 부석사는 義湘(625~702)이 文武王의 뜻을 받들어창건한 이래,

그 제자들에 의해 法燈이 계속되었다. 특히 신라 하대에는 神琳 이후 번성하여 건물의 중창은 물론 많은 인재가 배출되므로써 華嚴宗을 크게 일으키면서

석등과 같은 조형물이 조성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곧 이 무렵은 신라 景文王代(861~874)로서, 부석사가 위치한 太白山은 新羅五岳 중 北岳으로 숭앙되며 비중있는 화엄종 본찰의 중심무대가 됨에 따라,

사찰 내에는 석등 이외에 大石檀, 石龍, 長臺石, 石搭 등이 이 무렵이 9세기에 조성되었던 것이다. 한편 무량수전 앞 석등 외에 또 다른 석등 郡材 2기가

더 있는데 하나는 무량수전 동쪽 언덕의 삼층석탑 앞에 위치한 석등이고, 다른 하나는 醉玄屢 앞의 옥개석간주석 파편 일부를 통해 알수 있다

 

 

 

국보제 17호 무량수전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인정되기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는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 (1376)에 원융 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깔고 단청을 하였고

1969년에는 번와 보수하였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예로부터 건물의 구조는 단면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 집은 소위 9량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이다.

면석과 갑석을 짜맞추어 만든 가구식 기단과 사갑석을 받치는 지대석이 돌출된 계단, 원형 주좌와 고막이를 가진 초석의 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기법을 계승한 것이다. 계단 동측면에 선각된 '충원적화면(忠原赤花面) 석수김애선'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배흘림, 항아리형 보 등의 의장 수법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고안되 고도의 기법들이다.

안허리곡은 보통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하는데 기둥의 안쏠림과 관계가 있다. 안쏠림은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이다. 무량수전에서는 안허리곡과 안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다. 귀솟음은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하는 것인데 수평 부재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를 막아준다. 기둥의 배흘림 역시 기둥 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하다.

 

 

 

 . . . 무량수전 건축의 아름다움은 외관보다도 내관에 더 잘 드러나 있다. 건물 안의 천장을 막지 않고, 모든 부재들을 노출시킴으로써 기둥, 들보, 서까래 등이 얼키얼키 엮임이 리듬을 연출하며 공간을 확대시켜주는 효과는 우리 목조건축의 큰 특징이다. 그래서 외관상으로는 별로 크지 않은 듯한 집도 내부에 들어서면 탁 트인 공간 속에 압도되는 스케일의 위용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특히나 예의 배흘림 기둥들이 훤칠하게 뻗어있어 눈맛이 사뭇 시원한데 결구방식은 아주 간결하여 강약의 리듬이 한눈에 들어온다. . . 부석사의 절정인 무량수전은 그 건축의 아름다움보다도 무량수전이 내려다보고 있는 경관이 장관이다. 바로 이 장쾌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기에 무량수전을 여기에 건립한 것이며 앞마당 끝에 안양루를 세운 것도 이 경관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안양루에 오르면 발 아래로는 부석사 당우들이 낮게 내려앉아 마치도 저마다 독경을 하고 있는 듯한 자세인데, 저 멀리 산은 멀어지면서 태백산맥 연봉들이 남쪽으로 치달리는 산세가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이 웅대한 스케일, 태백산맥 전체가 무량수전의 앞마당인 것처럼 끌어안은 것이다. 이것은 현세에서 감지할 수 있는 극락의 장엄인지도 모른다. .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창작과 비평사)

 

무량수전의 공포 형식은 기둥 위에만 배치된 소위 주심포계인데 매우 건실하게 짜여졌다. 주두 위에서 공포의 짜임이 시작되고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북방계통의 수법이다. 주두와 소로는 내반된 곡선의 굽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공포 사이 포벽에 뜬 소로를 가지고 있는 점은 이 집만의 특징이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국보 제45호)를 모셨다.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만 동향하도록 모신 점이 특이한데 교리를 철저히 따른 관념적인 구상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열주를 통하여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감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진입하는 정면쪽으로 불상을 모시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는 드문 해결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집을 만든 대목(大木)의 뛰어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대들보 위쪽으로는 후대 건물과는 달리 천장을 막지 않아 지붕 가구가 잘 보인다. 굵고 가늘고 길고 잛은 각각의 부재들이 서로 조화 있게 짜맞춰진 모습은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무량수전의 천장 가구에서 고저장단의 운율을 느낄 수 있다고도 하였다.
이렇게 천장을 노출시키려면 각각의 부재가 아름답게 디자인되어야 하고 또한 정확하게 짜맞추어야 하므로 품이 훨씬 더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목수들은 이러한 건물을 많이 지었다. 특히 고려시대 주심포 집들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은 것이 많다.

원래 내부 바닥에는 푸른 유약을 바른 녹유전을 깔아서 매우 화려하였다. 아미타경을 보면 극락 세계의 바닥은 유리로 되었다고 하는데 녹유전은 이러한 이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장엄 도구의 하나였던 것이다.

 

소조아미타여래좌상 (국보 제45호)

부석사 무량수전의 주존으로 봉안된 고려시대 소조불상(흙으로 만들었다)이다. 우견편단의 대의에 촉지인을 하고 결가부좌로 앉아있다. 나발의 머리에 크고 둥근 육계가 올려졌고 상호는 살이 오른 풍만한 인상으로 이목구비의 표현이 뚜렷하다. 목은 긴 편이고 삼도가 일정한 간격을 보인다.

신체 표현도 넓은 하체로 인해 당당하고 어깨도 건장하고 넓다. 우견편단으로 걸친 대의에는 간격이 좁은 평행의습선을 일률적으로 새기고 있다. 불상의 뒤로 독립된 목조광배가 놓여있다.

신광과 두광을 2조선의 원으로 각각 구분하고 화염문을 돌려 주형거신광을 이룬다. 문양은 화염문과 당초문이 넓고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두광에는 3구, 신광은 4구의 화불을 부착시켰던 흔적이 남아 있다. 불단은 동향으로 설치되었고 안으로 폭 237cm, 측면이 200cm, 높이 105cm의 토석을 혼용한 수미단의 원형이 남아 있다. 주변에는 신라시대의 녹유전이 있으나 후설된 목조불단으로 인해 가려져있다.

1916년 무량수전의 해체수리시에 발견된 묵서명에는 공민왕 7년(1358) 적병에 의한 화재로 불상의 두부가 분리되어 우왕 2년(1376) 원응국사(기록에는 원륭이라 하나 잘못이다.)가 개금개조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무량수전불상개금문에서는 조선 경종 3년(1723) 통정 정상주를 비롯한 74명의 정성으로불상을 개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우견편단의 평행의습선이나 촉지인을 한 자세 등에서 통일신라 8세기 이후의 양식을 보이기도 하나 작고 두툼해진 입술표현이나 근엄해진 표정, 굳은 인체표현이나 딱딱해진 옷주름 등에서는 시기적인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고려시대 불상으로는 정교하고 소조상으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어서 매우귀중한 작품이다


 

 

 . . .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도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도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 기둥의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 .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 .
"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서서><최순우전집>)

. . 영풍 부석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형용사로는 부석사의 장쾌함을 담아내지 못하며, 장쾌하다는 표현으로는 정연한 자태를 나타내지 못한다. 부석사는, 오직 한마디, 위대한 건축이라고 부를 때만 그 온당한 가치를 받아낼 수 있다. . . "
한낱 여행객, 답사객의 눈이라도 풍요로운 자연의 서정과 빈틈없는 인공의 질서를 실수없이 읽어내고, 무량수전 안양루에 올라 멀어져가는 태백산맥을 바라보면 소스라치는 기쁨과 놀라운 감동을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니 부석사는 정녕 위대한 건축이요, 지루한 장마 끝에 활짝 갠 맑은 하늘과 밝은 햇살 같을 뿐이다. .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창작과 비평사

 

" . . . 건축가들에게 한국 전통 건축의 특성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찰을 말하라면 대개 영주 부석사를 첫 손가락에 꼽는다. 그만큼 부석사는 전통 건축에서 느낄 수 있는 멋과 맛을 모두 갖추고 있다. 신라시대 의상 조사가 창건한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법등이 끊기지 않은 오랜 역사성, 이 절만이 갖는 독특한 공간구조와 장엄한 석축단, 당당하면서도 우아함을 보이는 세련된 건물들, 오랜 세월을 거치며 단련된 공장(工匠)의 체취가 배어날 듯한 디테일은 부석사가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으뜸을 차지하게 되는 요소들이다. . . 산지나 구릉에 지어진 우리나라의 사찰은 대부분 종심형(縱心型) 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다. 중심축을 따라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가의 위계가 높아지도록 배치되어 있다. 소위 기승전결의 구성인데 부석사도 예외가 아니다. 사찰 입구에서 천왕문까지의 도입 공간이 기(起)라면 대석단 위 범종각까지가 전개해 나가는 공간인 승(承)에 해당되고 여기서 축이 꺾여 전환점을 맞는 안양문까지가 전(轉)의 공간이다. 안양루와 무량수전은 가람의 종국점이므로 결(結)이라 할 수 있다. . .
"(배병선 外, <부석사>(대원사:빛깔있는 책들 시리즈)

 

 

선묘각은 무량수전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의상 조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된 인물인 선묘를 모신 건물이다. 규모도 작고 기단도 없이 초라하여 마치 작은 사찰의 산신각 같은 느낌을 준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 규모의 맞배집인데 가구 방식이나 부재를 다듬은 수법으로 보아 최근세의 건물인 듯하다. 내부에는 1975년에 그린 선묘의 영정이 걸려있다

 

부석사 국보 세개를 지정한 비석들

 

 

 

 

  • 부석 : "뜬돌" 곧 부석이다.
    사찰의 이름이 유래된 뜬돌. 지금도 불전뒤 바위와 그것을 덮고 있는 큰 바위 사이에 끈을 넣어 보면 넘나드는 것으로 돌이 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애잔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온다.
  • 의상대사는 중국에서 불법을 공부할 때 잠시 머물렀던 신도의 집에서 선묘낭자와 만난다. 그후 선묘낭자는 의상대사에게만 온 마음을 바치지만, 출가한 승려를 향한 사랑은 애초부터 속세의 관념대로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묘낭자는 귀국길에 오른 의상과 이별하지 않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어 의상을 따라 신라로 온다. 그후에도 용이 된 선묘낭자는 그를 보호하고 도와 준다. 부석사를 창건할 때도 절터에 이미 자리를 잡은 도적떼를 물리치기 위해 큰 바위를 세차례나 하늘에 띄우는 이적을 행한다. 바로 이 전설을 간직한 뜬돌을'부석'이라고 부른다.

    서산 부석사에도 이와 비슷한 돌이 있고 전설도 유사하다.

     

     

     

     

     

    설명을 듣고 돌아볼수록 참 아름다운 절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