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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부여]경주에 석가탑이 있다면 부여엔 정림사지 5층석탑이 있다.

by 柔淡 2012. 8. 24.

백마강 황포돛배를 타고 일대를 돌아본 다음 궁남지 근처 백제향 연잎밥이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부여박물관과 정림사지 박물관을 둘러 보았는데 전에도 포스팅 했기에 생략하고 가장 인상깊었던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소개하려 한다.

 

부여시내의 중심부에 상징물처럼 남아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 당시의 건축물로는 부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물이다. 하지만 단 하나의 석탑만으로도 사비시대의 높은 문화를 상징하고도 남는다.

나무를 깍듯이 돌을 다듬어 알맞은 비율로 쌓은 탑은 세련됨과 조화미의 절정을 보여준다.

불국사의 석가탑이 신라탑을 대표한다면 백제를 대표하는 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멋 부린 장식 하나 남아

있지 않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탑은 그 장쾌한 모습을 자랑하듯 당당하다. 한때 탑의 기단부에 새겨진 글씨로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 정벌을 기념하여 쌓은 탑으로 오해받았다. 이후 고려시대 정림사의 중건 때 만들어진 기와

조각에 새겨진 글귀를 발견함으로써 제 이름을 찾게 되었다.

정림사지는 오층석탑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복원된 사찰의 형태를 남기고 있다. 사찰 입구를 채우던 연못 터는

복원되었고 건물 기단을 이루던 주춧돌은 자리를 찾고 있다. 석탑 뒤 전각 내부에 앉아 있는 소박한 모습의

불상은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정림사지박물관은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며 첨단 전시 기법으로 백제의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배흘림기둥

으로 세련된 모습의 백제 건축양식을 복원한 중앙홀을 지나 백제불교문화관으로 들어가면 전돌의 제작과정, 금동

불상의 모습 등을 이해하기 쉽게 모형으로 보여준다. 이어지는 정림사지관은 출토유물과 1,400년 전 석탑의 제작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위용

 정림사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문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석탑을 다양한 방향에서 찍어봤다.

 

 

초층탑신에 새겨진 비문을 줄여서 당평제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혹은 백제를 정벌했던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의 공을 기록했다 하여 소정방비라고도 부른다. 능주장사 판병부에 있던 하수량이 글을 짓고 하남사람 권회소가 글씨를 썼다. 비문의 제목은 전서로 새겨져 있다. 비문에 따르면 의자왕, 태자융, 효, 인 및 대신과 장군 88인, 백성 12,807명을 당나라의 수도 낙양으로 압송하였다고 한다.

 

 

 

 

 

 

2년전에도 자세하게 찍어 포스팅한 내용이 있다. http://blog.daum.net/j68021/13744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