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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강원

[고성]얼마나 경치가 좋길래 남북한 지도자가 화진포에 별장을 만들었을까? - 이기붕 별장

by 柔淡 2012. 9. 24.

김일성 별장에서 내려와 100m정도 직진하면 돌로 외벽을 감싼 자그마한 건물이 멋진 해송에 둘러쌓여 있는데

그게 1960년 4.19 혁명발발 당시 부통령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렷던 이기붕 부통령의 별장이다.

 

이기붕에 대해 먼저 어떤사람인지 간단히 알아보자

본관 전주(全州). 호 만송(晩松). 서울 출생.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선교사 J.R.무스의 통역으로 있다가

그의 도움으로 상하이[上海]를 경유, 미국에 가서 고학으로 아이오와주(州) 데이버대학을 졸업하였다.

그후 뉴욕에서 허정(許政) 등과 교포신문인 《삼일신문(三一新聞)》 발간에 참여하였다. 1934년 귀국, 1945년

이승만(李承晩)의 비서로 정계에 들어갔으며, 1949년 서울특별시 시장, 1951년 국방부 장관이 되어 국민방위군

(國民防衛軍) 사건을 처리하였다.


1951년 이승만의 지시로 이범석(李範奭)과 함께 자유당(自由黨)을 창당, 2년 후 이범석의 족청계(族靑系) 세력을

축출하고 중앙위원회 의장에 취임, 실권을 장악하였다. 1954년 5월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민의원 의장이 되고,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초대 대통령의 중임(重任)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 일단 부결된 것을

사사오입(四捨五入)으로 번복, 가결을 강행하였다.


1956년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고, 1960년 3월 15일 대통령선거 때 공개·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혁명이 일어나 결국 부통령을 사임하고, 경무대(景武臺)에

피신해 있다가 당시 육군장교이던 장남 강석(康石)이 권총을 쏘아 전가족이 자살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3.15 부정선거의 원흉이었으며 장남 이강석을 당시 83세인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들일만큼

권모술수에도 뒤어났고 그의 부인 박마리아도 같은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런 이기붕과 박마리아가 자주 찾았던 곳이란고 한다.

 

이기붕 별장은 1920년대에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어 현재까지 보존된 건물로서 해방 이후에 북한공산당 간부

휴양소로 사용되어 오다가 휴전 후에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가 개인별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1999년 7월 전시관으로 개수 운용하고 있습니다.
박마리아는 생전에 인근 고성군 대진읍에 대진교회를 세우고 자주 이 곳을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별장 내 집무실과 응접실 등이 갖춰져 있으며, 주전자, 촛대, 문갑 등이 보관돼 있습니다.

 

 멋진 해송에 둘러쌓여있는 이기붕 별장

 담쟁이 넝쿨에 둘러쌓여 있다.

 

 

 

 

 

 

 

 내부의 전시품들

 

 

 

 

 

 

 화진포 호수가 가까이에 보인다.

  

 

 

 육군 화진포 콘도

 

 

 금구도. 고구려 광개토 대왕릉이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가을동화의 촬영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