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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봉화]1400년만의 긴잠에서 깨어난 국보 21호 신라시대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지림사

by 柔淡 2012. 12. 29.

점심을 먹은 후 찾아간 곳은 지림사란 절집으로 신라시대의 거대한 마애불이 있는곳이다.

지난여름에는 전혀알지 못해서 바로 옆으로 지나가면서도 들러보지 못했던 것이다.

역시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것 같다.

이석불은 1947년 이곳에 암자를 짓고 수도하던 비구니 스님이 꿈에서 부처님을 뵙고 다음날 밭갈이를 하다가

우연히 발굴했다는 일화가 전해내려 오는데 연구결과 7세기 후반인 서기 650~700년 사이에 세워졌으니

무려1400년만의 긴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태백산 줄기와 낙동강 상류를 끼고, 빼어난 산수와 천혜의 자연경관을 지닌 봉화 땅, 봉화는 산이 깊으며 도촌리,

물야면 개단리, 춘양면 의양리 등에 선사시대 고인돌이 많은 곳이다. 삼한시대에는 영주․안동과 함께 진한 기저국

땅이었다. 고구려에서 신라로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이 지역에 여러 유적을 남겼다. 주변에는 첩첩오지의

오롯한 양반마을로 조성된 닭실마을과 영남의 대표적인 양반가 안동권씨 문중 충재 권벌의 종택이 있고 석천정사,

가평리 계서당과 축서사, 청량산 청량사, 서동리삼층석탑과 각화사 등이 분포되어 있는 곳이다.
봉화에서 부석사로 향하는 길목, 들녘에서 만나게 되는 신라의 부처가 있다. 바로 지림사에 있는 국보로 201호인

북지리 마애불여래좌상이다. 지금은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그 옛날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존재했던

이곳은, 그와 관련한 유물들이 뒤늦게 발굴되기도 하였다. 또한 원통전 뒤편의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좌상과 탑을

돋을새김한 조각도 놓치지 않을 볼거리이다.

* 창건배경 및 역사
호랑이가 걸터 앉은 것과 같은 형국이란 의미를 지닌 북지리 호거산(虎踞山)에 자리하는 지림사는 국보 제201호로

지정된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이 현존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수도하는 승려가 500여 명이 될 정도의 대사찰이

었던 곳으로 축서사 창건설화에도 등장한다.

즉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의상대사가 지림사에서 산쪽을 바로 보니 멀리 서광이 비취는 것이 보여 빛이 도달한

곳에 지금의 축서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 것이 그것. 조선 정조 때(18세기)에 저술된『신증동국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지림사는 문수산에 있다(智林寺在文殊山)’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중․후기까지

계속하여 사찰이 존속하며 법통을 이어온 것으로 알 수 있으나,‘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혹은‘축서사로 인하여 사세가

기울었다’는 등의 이유로 폐사되었다고 구전되고 있다. 1949년경에 와서야 현 위치에 지림사를 재건하여 국보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을 보호 관리하며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국보 21호 봉화북지리 지림사 마애여래좌상

 

중창불사가 한참이다.

 

 

 

 

 

 

 

봉화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은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 657-3번지에서1947년 부지정리중에 발견되었으며 호랑이가 걸터 앉은 것과 같은 형국이란 의미를 지닌

북지리 호거산(虎踞山: 일명 호골산(虎骨山)끝 자락암벽에 자리하고 있고 1949년경 수월암이라는 암자를 건립 1980년 9월 16일 국보 제201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을

보호 관리 하며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가 최근에는 창건당시의 절 이름인 지림사로 개명하여 대웅전 중창불사를 하고 있다.


이 마애불은 자연암벽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거대한 방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높이 4.3m의 마애불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긴 것이다.
불상 뒤편의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하였으며, 곳곳에 작은 부처를 표현하였고, 머리광배의 중심에는 정교한 연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불상은 원래 감실(龕室) 안의 본존불(本尊佛)로 조성된 보기드문 신라시대의 거대한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이다.

현재 감실의 돌벽(石壁)도 무너졌고, 불상에도 군데군데 다소 파괴되고 풍화되었지만, 아직도 부처의 위용(偉容)은 여전히 남아 있는 편인데 거의 원각상에 가깝게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겼기 때문에 위엄스러운 모습이 더욱 돋보이고 있다. 어깨는 다소 움츠린 듯하지만 체구는 당당한 편이며,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에서

 U자형의 굵직한 주름을 이루면서 양 팔을 거쳐 길게 늘어져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까지 덮고 있다.

넓고 큼직한 얼굴은 고졸(古拙)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박진감을 나타내고 있는 있고 오른손을 가슴에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왼손은 무릎에 내려

여원인(與願印)을 짓고 있는 큼직한 두 손은 이 불상의 적정(寂靜)하고 장중한 멋을 한결 잘 보여주는 것이다.

마애불상을 만든 시기는 얼굴이나 신체에 표현된 부드러운 모습, 넓은 무릎과 무릎은 덮어 내린 옷자락의 소박한 상현좌(裳縣座), 불상 주위에 새긴 옛스러운

화불(化佛)등을 고려할때 이러한 특징은 7세기 전반기의 삼국시대 불상양식을 나타내고 있지만, 얼굴이나 체구에 표현된 부드러운 조각력 때문에 실제의

제작년대는 7세기 후반기로 추정되며, 위엄스럽고 자비스러운 불상미(佛像美)를 잘 보여주는 이 불상은 큰절의 본존불답게 ,영주 가흥동 삼존불좌상(보물

제221호)과 함께 이 시기 영주·봉화 일대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신라 불교조각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마애석불(磨崖石佛)은 한국을 비롯하여 인도 ·중국 ·일본 등에 퍼져 있으며 수법도 양각(陽刻:浮彫) ·음각 ·선각(線刻) 등 다양하다.

그 기원은 서아시아, 이란 고원 등의 부조석조유물의 영향을 받아 BC 3∼2세기 무렵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바자(Bhaja) 석굴의 태양신 수리야의 양각상(陽刻像)을

 비롯하여 굽타왕조시대의 데칸고원 남서부에 만들어진 아잔타(Ajanta) 석굴, 엘로라(Ellora) 석굴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인도 북부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전해진 바미얀(Bamiyan)의 53 m 및 55 m의 대불(大佛)은 암벽에 불감(佛龕)을 만들고 조립한 대표적 예이며 중국에서도

거상(巨像)은 대부분 마애석불이다. 4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둔황[敦煌]의 텐포동[千佛洞]을 비롯하여 텐티산[天梯山] ·마이지산[麥積山] ·윈강[雲崗] ·

룽먼[龍門] 등의 마애석불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은 7세기경 백제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958년에 발견된 충남 서산시 용현리(龍賢里)의 마애석불과 태안(泰安)의 마애석불은 백제시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국보로 지정된 석굴암, 경북 월성군 건천읍(乾川邑)의 단석산 신선사마애석불군상(斷石山神仙寺磨崖石佛群像), 경북 봉화 북지리마애

여래좌상(奉化北枝里磨崖如來坐像) 등이 있으며, 경남 함안군 군북면(郡北面)의 방어산(防禦山) 마애불, 경주 남산의 마애석불군, 경남 합천군 가야면(伽倻面)의

치인리(緇仁里) 마애불입상 등은 보물로 지정되었고, 그 밖에 지방문화재 ·비지정문화재의 수많은 마애석불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

 

 

 

 

 

 

 

 

 

 

 

대웅전 뒤쪽의 또다른 마애석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