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광주·전라

[남원]국보와 보물이 가장 많은 최고의 길지, 지리산 실상사 극락전

by 柔淡 2013. 9. 3.

앞서 실상사 보광전과 두개의 탑 등 주 건물을 소개 했는데 진짜 보물들은 왼똑의 극락전 쪽에 있었다.

실상사는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절집인데 그중에서도 극락전 앞의 터가 기가 좋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조계종 실상사파로 종명을 개칭한 고려시대는 실상사의 최대 융성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127년-1130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 실시한 발굴 조사에서도 창건 이후 약 300년이 지나 대대적으로 중창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 조선은 세종 재위 시에 불교계의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묶고 전국에 36개 사찰만을 남겨 놓았다.

당시 실상사는 본래 실상사의 말사였던 산내면 원천리 소재 원수사(源水寺)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말 이후 잦은 병화로

쇠퇴해지기 시작한 실상사는 15세기 중반에 이르러 완전히 폐사되었다.

이후 200년간 절의 경역은 민간 경작지로 사용되어 왔다. 철불과 석탑만이 논바닥에 방치되어 오다가 1690년(숙종 16) 침허조사에

의해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36동의 건물을 중창하게 되었다.

그러나 침허조사가 중창한 대가람은 1883년과 1884년의 화재 사고로 약사전, 명부전, 극락전 등 3채의 불전과 승당 1채만 남겨두고

모두 전소되었다. 1884년 월송대사가 대적광전이 불탄 자리에 지금의 보광전 건물을 새로 중창하였다.

 

실상사(實相寺) 극락전(極樂殿) 이 건물은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다. 원래의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타버려 숙종 때

다시 지었다. 그러나 고종 때 함양출신 양재묵(楊載默)과 산청출신 민동혁(閔東赫)이 절터를 가로채고자 건물을 불태워 버렸다.

후에 승려들이 힘을 모아 지금의 건물로 복구하였다. 건물 정면에는 교(交)자무늬 문살로 짠 문짝과 빗살무늬 문살로 짠 문짝을 번갈아 달아

다채로움을 더하였다. 둥근 기둥은 위아래 굵기의 변화가 없이 밋밋하고, 천장은 바둑판 모양으로 짜 넣었다.

 

이곳이 남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에서도 기가 가장 좋은곳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나는 문외한이라 그런지 잘 못느끼겠다.

스님들이 머무는 요사채

 

극락전이 있는숲

여기에 대부분의 보물이 있다.

 

 

 

 

 

 

 

 

 

 

 

 

 

 

 

유명한 생태뒷간 해우소

 

 

엣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실상사, 마음이 평온해지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