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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함양]한국 선불교의 요람 벽송사

by 柔淡 2014. 6. 2.

지리산종주도 두번하고 자락에도 여러번 갔었지만 함양족에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오도재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달려내려가니 지리산 칠선계곡입구에 다다른다.

거기서 차를몰고 가파른 길을 10분정도 올라가니 서암정사와 벽송사가 나오는데

벽송사부터 먼저 들어가보기로 한다.

 

벽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 신라말경에 창건된후 조선 중종 경진년(1520)에

벽송 지엄대사(碧松 智嚴大師)가 중창, 『벽송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서산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이전에 한국선맥을 이어온 벽계정심(碧溪正心)과 벽송지엄(碧松智嚴), 부용영관 뿐만 아니라

환성지안(喚醒志安), 서룡상민(瑞龍祥玟)등 조선 선맥을 빛낸 8분의 조사가 이 벽송사에서 수도 정진한 도량으로써 한국선(禪)과

벽송사의 인연은 각별하다

숙종30년(1704) 실화(失火)로 소실(燒失)되었다가 환성지안(喚醒志安)대사가 중건하였고, 철종 원년(1850)에 서룡당 상민

(瑞龍堂祥玟)대사가 중수하였으나 1950년 6.25동란때 다시 소실되어 1960년 원응 구한(元應 久閒)스님이 쓰러진 가람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법당인 원통전(圓通殿)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장선원(方丈禪院)과 간월루(看月樓)가 있으며,

전면에는 산문(山門)과 종루(鐘樓)를 배치하였고, 후면에는 산신각(山神閣)이 있다

또한 경내에는 보물제474호인 『벽송사3층석탑』과 민속자료 제2호인 『벽송사 목장승』,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인 벽송당

지엄영정(碧松堂智嚴影幀), 경암집책판(鏡巖集冊版), 묘법연화경책판(妙法連華經冊版)등의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특히 이 사찰은 1950년대 전란(戰亂)시 빨치산 루트로 사용되는 등 처참한 비극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벽송사의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수 없으나 절 뒤쪽의 창건당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3층석탑으로 미루어볼 때 그 시기를

신라말이나 고려초로 보고 있으며 현재 3층석탑은 보물 제4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중종 15년(1520)에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하여 벽송사라고 전하여지며 한국전쟁때는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된적도

있으며 이때 불에타 소실된 이후 곧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벽계 정심의 맥을 이어 조선 불교태고 선맥의 5대 정통이 되었고 부용영관, 원오, 일선등 60여명에게 선을 가르쳤던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벽송사 나무장승은 그 풍부한 표정에서 민중미학의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빼어난 장승가운데 하나이며, 순천 선암사 앞에

있었던 나무장승과 쌍벽을 이룰 만큼 조각솜씨도 뛰어나다. 전체 높이는 4m 정도 되는데, 예전에는 지하에 1m 정도가 묻혀 있고

썩은 몸통을 지탱하기 위해 둑을 쌓아 1m 정도가 더 묻혀 있어, 드러나 있는 것은 2m 정도였으나 현재는 벽송사 경내에 정려를

지어 보관하고 있다.

왼쪽 장승은 몸통 부분에 '금호장군' 이라 음각돼 있고, 오른쪽 장승은 '호법대장군'이라 음각돼 있다. 두 장승에 새겨진 명문으로

미루어, 사찰 입구에 세워져 사천왕이나 인왕의 역할을 대신하여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벽송사 전경

 

 

 

 

 

 

 

 

 

 

 

 

 

 

 

 

 

 

 

 

 

 

 

 

 

 

 

 

선불교의 요람답게 조용하고 소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