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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함양]소수서원에 이어 두번째로 지어진 서원건축의 효시, 남계서원

by 柔淡 2014. 6. 3.

 일요일 아침을 먹고 함양여행 두번째날을 시작한다.

오늘은 항얌군의 북쪽지방을 돌아보고 점심을 먹은후 집으로 출발할 예정이다.

그 첫번째 목적지가 남계서원이다.

 

[한국미의 재발견 - 궁궐, 유교건축 , 솔출판사, 저자 이상해 에서 인용]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에 위치한 남계서원(灆溪書院)은 1552년(명종 7)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고, 1566년(명종 21년)에 '남계(灆溪)'라는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남계'는 서원 곁에 흐르는 시내 이름으로, 서원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소실된 뒤 나촌(羅村)으로 터를 옮겼다가,

1612년(선조 43) 옛터인 현재의 위치에 다시 옮겨 중건되었다. 남계서원은 풍기 소수서원, 해주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이어 창건된

아주 오래된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의 하나이다.

 

함양 땅은 예로부터 '좌안동 우함양'이라 하여, 한양에서 볼 때 낙동강 왼쪽인 안동과 오른쪽인 함양은 모두 훌륭한 인물을 배출해

내어 학문과 문벌에서 손꼽히던 고을들이다. 안동이 퇴계 이황으로 유명하다면, 함양은 남계서원에 모신 정여창으로 유명한 곳이다.

앞서 일두 정여창 고택에서 소개했던 정여창은 남계서원에서 서북쪽으로 위치한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가터에

세워진 '함양정병호가옥(咸陽鄭炳鎬家屋, 정여창고택)'은 중요 민속자료 제18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데, 건물 배치 및 외부

공간 구성, 사랑채 앞 석가산의 조성 등에서 조선시대 사대부 주거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정여창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김굉필과 교분이 두터웠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정여창은 김종직의 제자로 사림의 한 사람이라 하여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호 '일두'는 정여창이 스스로를 '한 마리의 좀'이라는 뜻으로 낮추어서 부르기 위해 지었는데, 이는 정이천(程伊川, 1033∼1107,

중국 북송 때의 유학자)의 '천지간에 한 마리 좀에 불과하다'는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건물 배치에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과 달리 남계서원은 서원의 제향공간에 속하는 건물

들은 서원 영역 뒤쪽에 자리잡고, 강학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 영역 앞쪽에 자리잡은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초기 배치 형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서원이다.

 

1561년에 완성된 사당은 강당 뒤 가파른 계단을 올라 경사지 위의 높은 곳에 위치하여 강당과 적극적으로 격리시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당 앞 서남쪽에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데우는 곳인 전사청이 북쪽을 향해 서 있다. 사당에는 정여창을 주벽(主壁)

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鄭蘊, 1569∼1641)과 강익(姜翼, 1523∼1567)의 위패가 각각 모셔져 있다.

사당에서 서원 일곽과 그 주변을 내려다보면, 서원 좌우로는 연화산에서 뻗어나온 산줄기가 에워싸고 있고, 서원 앞으로는 덕유산

에서 발원한 남계천이 화림구곡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앞 넓은 들판 너머로 안산인 백암산이 서원을 마주보고 있다.

강학공간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인 명성당(明誠堂)은 1559년에 완성된 강당으로 정면 4칸 규모의 건물에 중앙의 2칸은 마루이고 양쪽

각 1칸은 온돌방으로 된 협실이다. 강당 이름 '명성(明誠)'은 『중용(中庸)』의 "밝으면 성실하다[明則誠]"에서 취했다. 강당 건물과

협실의 이름은 성리학에서 수기(修己)를 강조하는 이념 세계를 건축에 반영하였을 뿐 아니라, 정여창의 학덕과 정신적 풍도(風度)를

후대 사람들이 사모하고 우러러본 데서 나온 것이다.

강당 앞 좌우에는 동재인 양정재(養正齋)와 서재인 보인재(輔仁齋)가 서 있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2칸 규모의 건물인데, 각 1칸은

온돌방이고, 문루인 풍영루(風咏樓) 쪽의 나머지 1칸은 각각 애련헌(愛蓮軒), 영매헌(咏梅軒)이라고 이름 붙인 누마루로 되어 있다.

동재와 서재는 대지의 경사를 이용하여 누문보다 한 단 높게 조성한 것으로, 지면이 낮은 쪽에는 누마루를 조성하여 조망이 좋도록

하여 공간이 외부 자연으로 연장되게 하였다.

 

누마루 아래 누문 쪽으로는 1564년(명종 19) 동·서재와 동시에 조성된 연당(蓮塘)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두 개의 연당이 서원에

조영된 예는 다른 서원에서는 보기 드물다. 정여창은 송나라 때의 성리학자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 영향을 받아 매화와

연꽃을 사랑했다고 한다.

누 이름을 애련헌, 영매헌이라고 한 점과 연당 주변에 매화를 심고 연당 안에 연꽃을 심은 점도 이를 반영한다.

 

서원 문루인 풍영루 2층 다락에서 서원을 바라볼 때, 서원은 경사지를 이용하여 건물들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자연

스러움의 정형화를 추구한 형식으로 조영되어, 전체적으로 호방함과 당당함이 느껴진다.

 

입구 영풍루

 

 

 

 

 

먼저 학문영역이다. 

강당과 동, 서재

 

 

 

 강당임 명성당

 

 

 서재인 보인재와 영매헌

 

 동재인 양정재와 애련헌

  경판고

 

 제향영역인 사당은 높은 게단을 올라야 한다.

 

 오래된 서원답게 수백년된 배롱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사당

 

 

 

 사당에서 내려다본 학문영역

 매화와 연꽃을 사랑했다는 일두선생 사당답게 매실열매가 탐스럽게 열려있다.

 특이하게 두개의 연못이 있다.

 연못안에는 연꽃이 아니라 수련이 곱게 피어있다.

 

 

 

 

 서원 입구 풍경

 아홉개의 서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모양이다.

대부분 가본곳인데 돈암, 무성 필암서원 세군데는 못가본곳 같다.  

 

 이제 바로 옆에 있는 청계서원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