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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동유럽·발칸7개국

동유럽/발칸 033 - 0422 헝가리 부다페스트, 역사의 한이 서린 부다왕궁

by 柔淡 2016. 6. 16.

어부의 요새와 마차시 성당일대를 둘러보고 걸어서 10분쯤 내려가면 부다왕궁이 나온다.



제일 먼저 다뉴브를 향해 날아오를 듯 날개를 활짝 펴고 '왕의 칼'을 발에 든 투룰 상이 보인다. 그곳부터가 왕궁이다. 다뉴브강 쪽 왕궁

앞뜰로 가면 먼저 말을 탄 청동상이 우리를 맞는다. 주인공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호자였던 사보이 가문의 유진(Eugene) 왕자(1663~

1736)로, 그는 본래 파리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루이 14세를 섬기는 대신 오스만트루크와 싸움을 벌이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레오폴트(Leopold) 1세 황제를 주군으로 섬겼다.

당시 프랑스 궁정에서는 유진 왕자가 루이 황제의 실질적인 아들이라는 루머도 있었다. 이 조형물은 1697년 그가 이끈 연합군이 오스만

트루크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던 젠타(Zenta, 현 유고의 센타(Senta))전투 승전 기념비로 1900년에 세워졌다.

왕자의 쌍둥이 동상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주지인 비엔나의 호프부르크(Hofburg) 신궁() 앞에도 있다.

왕궁 터는 영광의 자리인 동시에 슬픔이 가득한 곳이다. 지어 놓으면 전쟁이 휩쓸어 폐허만 남고, 다시 지으면 또 전쟁이 몰려온 곳이기

때문이다. 부다페스트의 슬픈 역사는 이곳에서 절정을 이룬다. 마르깃섬의 슬픈 사연을 제공한 마르깃 공주의 아버지 벨라 4세가 1241년

타타르 족의 침공 후 처음 왕궁을 건설하였다. 그 후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Sigismund, 1387~1437) 통치 시절 대대적인 고딕식

왕궁이 증축되었는데, 이 건물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궁으로 손꼽힐 정도였다 한다.

부다 왕궁을 중심으로 황금기를 꽃피운 이가 바로 마티아스(Matthias)왕(1451~1490). 당대 르네상스식 건물로는 유럽 최고로 꼽혔을

뿐만 아니라 헝가리에서도 가장 황금기로 꼽히는 시기였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좋은 시절인가 했더니 오스만트루크가

헝가리를 공격하여 헝가리 전역 중 부다까지 정복해 버렸다. 한쪽은 합스부르크, 한쪽은 터키, 그리고 또 다른 한쪽이 터키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는 이른바 헝가리 3국시대가 개막한 것이었다.


그나마 터키는 부다성을 공략하면서 왕궁을 파괴하는 심각한 전투는 치르지 않았다. 외환()은 본래 내우()에서 비롯되는 것이

역사의 법칙. 왕권을 갖겠다는 싸움판에서 오스만트루크는 왕궁을 거의 어부지리()로 얻었던 셈이다. 그러나 1686년, 부다

왕궁을 장악하고 있던 오스만트루크와 기독교 연합군 사이의 최후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전투 속에서 왕궁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몸에 병이 들 때보다 날 때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격언을 왕궁의 참담한 역사에서 느낄 수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헝가리는 오스만트루크를 대신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터키가 물러간 지 10여 년 만에 급한 대로 좀 궁색하지만

소박한 왕궁을 짓긴 했던 모양이다. 그러다 1779년이 되어서야 대대적인 확장을 했다. 부다성에 다시 왕궁이 서긴 했으나 그것은

헝가리 민족의 왕을 위한 것이 아니라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가문을 위한 것이었다.

지배자의 학정에 짓눌리고 있던 마쟈르인들은 결국 일어나 오스트리아를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1848년부터 2년간 계속된

헝가리 독립 전쟁이다. 이 전쟁은 헝가리인의 불굴의 투지와 기개를 보여주었으나 참담한 패배로 끝났고 부다의 언덕에 세워진 왕궁은

다시 내려앉아 폐허가 되고 말았다.

왕궁이 있는 바르 헤지는 그야말로 천혜의 왕궁 자리였거나 지기()의 팔자가 궁성 터로 타고 났나보다. 또다시 왕궁은 건설되기

시작했고 1904년에 완공되었다. 1867년 헝가리는 오랜 염원이던 식민지에서 벗어나 오스트리아와 같은 자격을 가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되었으니 이번 왕궁 건설이야말로 마쟈르인의 기쁨이었다. 폐허가 된 전의 왕궁보다 규모가 배 이상 확장된 대역사였다.

수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나치 독일은 왕궁을 헝가리점령본부로 사용하고 있었다. 전쟁 말기 부다페스트를

침공해 들어온 소련군이 부다 왕궁을 포위했으니 치열한 전투가 불가피해졌다. 결말은? 또다시 다 무너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왕궁은 다시 건설되기 시작했으나 시대는 이미 공산주의 시대였다. 당초 고딕식에 바로크식까지 가미되어 건설된

이제 왕궁이 아니라 온전히 박물관용으로 건설된 것이다. 무늬는 왕궁이었지만 속은 헝가리국립미술관, 부다페스트 역사박물관, 그리고

국립 세체니 도서관이 들어가 있다. 이 왕궁 터에도 아직 전쟁의 참상은 남아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몇 개의 건물에는

아직도 숭숭 뚫린 총알 자국이 가득하다.

부다 왕궁의 국립미술관 1층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왕궁 복원 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조각품의

하나는 벨라 3세의 조각상인데, 이 유물은 대개 800여 년 전인 12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헝가리 전역에서 수집된 고딕,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 유물들과, 19·20세기 헝가리 저명 작가들의 콜렉션도 있다. 대표적인 헝가리 미술가로는 「1686년 부다성 탈환」

등의 대표작을 남긴 쥴라 벤추르(Gyula Benczur)가 있다. 그의 그림은 이스트반 대성당과 국회의사당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부다페스트 역사박물관은 부다페스트뿐만 아니라 왕궁의 역사를 주로 다루고 있다. 이 박물관을 돌아보면 중세 시대 부다와 페스트시대를

조명할 수 있도록 당시 출토 유물들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

역시 부다 왕궁에 자리 잡은 국립 세체니 도서관(Országos Széchényi Könyvtár)은 세체니 란치히드를 건설했던 이스트반 세체니의

아버지인 페렌츠 이스트반의 주도로 창설되었다(그는 1802년에 자신이 수집했던 유물과 서적을 헝가리 민족에게 기증했는데 그것이

곧 헝가리 국립박물관의 기원이다). 국립 세체니 도서관은 처음에는 국립박물관의 서적코너였다가 후에 분리되었다. 도서관이 부다성에

자리 잡은 건 비교적 최근인 1985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르 헤지 (부다페스트-다뉴브의 진주, 2006. 6. 30., ㈜살림출판사)


때마침 헝가리 육해공군 군악대의 합주가 왕궁입구 대통령궁에서 열리고 있었다. 이런일은 관광객들에게 아주 신선한 기회다.

대통령궁은 울타리도 없이 근위병 단 두명만이 입구를 지키고 있고 옆에는 한창 공사중인데 외부차량이 아무렇게나 주차해 있어

아주 소박해 보였다.


헝가리의 건국신화에 나오는새 트룰

마차시 성당에서 왕궁을 향해 걸어간다. 부다에서 가장 오래된거리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집





박물관과 도서관 증축공사중



대통령관저


대통령궁의 근위병



부다왕궁 으로 내려가는 계단

대통령궁 입구에서 육해공 3군 군악대의 연주, 생도시절 수없이 들었던 라데스끼 행진곡도 연주한다.





왕궁에서 내려다본 페스트 지역





나중에 가볼 이스트반 대성당이 중앙에 보인다.





왕궁




군악대의 연주를 경청하는 엄마와딸


케이블카를타고 올라오면 이곳으로 온다.





대통령궁





이제 성 이스트반 사원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