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봉화]호남에 소쇄원이 있다면 영남엔 청암정이 있다.

by 柔淡 2017. 11. 29.

10여년 넘게 주말여행을 다니면서 전국 각지의 오래된 정원을 보고 다녔는데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곳이 

담양의 소쇄원과 봉화의 청암정이다.


두곳 다 조선 중종때 조광조의 난과 연루되어 고향으로 낙향한 선비들이 세웠는데 봉화의 청암정은 1526년 충재권벌이 세웠고

담양의 소쇄원은 6년후인 1532년 양산보가 건축했다고 한다. 규모는 소쇄원이 훨씬 크지만 하나의 거북바위 위에 세워진

청암정은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계절마다 다양한 경치를 보여주는 독특한 정원이다.

그래서 늘 청암정에 오면 담양의 소쇄원이 생각나고 소쇄원에 가면 봉화의 청암정이 생각난다.



충재 권벌( , 1478~1548)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성균관 생원 권사빈()과 파평 윤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안동의 북후면 도촌리는 외가 쪽인 파평 윤씨 세거지로서 그의 관료로서의 길이 뚫림과 막힘은 파평 윤씨와의 관련이

매우 깊었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밝았는데 27세 때인 연산군 10년에 대과에 급제하였으나 연산군에게 직언을 올렸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내시 김처선의 ‘처’()자가 글에 있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가 3년 뒤인 1507년에 다시 급제하여 관직에 발을 들였다.

사간원, 사헌부 등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는데 중종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했으며 조광조가 신진사류의 대표로 왕도정치의 뜻을

펼칠 때 영남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기호사림파와 연결하여 개혁정치에 참여하였다.

1519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대거 밀어붙인 기묘사화1)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하여 어머니의 묘소가 있던 유곡에 자리잡았다.

13년 뒤인 1533년 복직된 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68세 때인 1545년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 해에 명종이 즉위하면서 을사사화2)가 일어나자 윤임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를 올렸다가 파직되었고, 이어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3)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되어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으니, 평생 관직에 머물면서 비교적 파란이 많았던 생애라고 하겠다.

유곡의 유적들은 그가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던 동안 머물면서 일군 자취들이다.

이곳 일대는 권벌과 관련된 유적들이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닭실마을은 권벌의 5대조가 안동에서 옮겨와 자리잡은 곳으로 권벌 이래로 매우 번창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알려진 안동 권씨말고

특별히 ‘유곡 권씨’라는 식으로 따로 지칭하기도 한다. 안동지역에서 하회의 풍산 류씨를 ‘하회 류씨’, 오천 군자리의 광산 김씨를 ‘외내 김씨’,

임하면 천전리의 의성 김씨를 ‘내앞 김씨’ 하는 식과 같다.

이처럼 종가 마을이 있는 장소와 연결시켜 호칭하는 방식은 영남 반가 사이에서는 매우 일반적이다.


종택 서쪽으로 돌담을 통해 작은 쪽문을 나서면 바로 청암정()이다. 충재는 1526년 봄에, 자신의 집 서쪽에 재사를 짓고 다시

그 서쪽으로 사() 6칸을 바위 위에 지어 주변에 물을 돌렸으며 이어서 동문 밖에 대를 쌓았다고 했으니, 매우 계획적인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작은 3칸 건물이 바로 서재인 ‘충재’()이다. 이곳에서 공부하다가 바람을 쐬일 양으로 지은 곳이

휴식공간인 청암정으로, 커다랗고 넓적한 거북바위 위에 올려 지은 자형 건물이다. 6칸으로 트인 마루 옆에 2칸짜리 마루방을 만들고,

마루방 가로 퇴를 둘렀다. 건물을 빙 둘러서 연못 척촉천()을 두르고, 돌다리를 건너야 정자로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운치가 있다.

주위에는 향나무·느티나무·단풍·철쭉·나리꽃이 어우러져 자연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 청암정의 경치를 두고 “정자는 못 복판 큰 돌 위에 있어 섬과 같으며, 사방은 냇물이 고리처럼 둘러 제법

아늑한 경치가 있다”고 하였다. 권벌은 영남의 주도적인 학자들인 이현보, 손중돈, 이언적 등과 교유하였으며 23년 연하인 퇴계 이황과도

학문적인 공감을 나누었다. 그래서인지 이 청암정에는 충재의 친필 글씨말고도 퇴계 이황, 번암 채제공, 미수 허목 등 조선 중후기

명필들의 글씨로 새긴 현판이 여럿 걸려 있다. 그중 ‘’이란 현판은 미수 허목의 글씨인데, 옆에는 “미수가 임술년 4월에 글씨를

써서 보냈다. 그때 나이 88세로 심부름꾼이 떠나기도 전에 아프기 시작하였는데 그 달 하순에 세상을 떠나, 오호, 이것이 그의 마지막

절필이다” 하며 글씨의 내력과 허목을 기리는 안타까운 마음을 절절하게 적어놓았다.

또 퇴계 이황은 65세에 이곳 청암정에 와서 이렇게 읊었다.

내가 알기로는 공이 깊은 뜻을 품었는데
좋고 나쁜 운수가 번개처럼 지나가버렸네.
지금 정자가 기이한 바위 위에 서 있는데
못에서 피고 있는 연꽃은 옛모습일세.
가득하게 보이는 연하()는 본래의 즐거움이요
뜰에 자란 아름다운 난초가 남긴 바람이 향기로워
나같이 못난 사람으로 공의 거둬줌을 힘입어서
흰머리 날리며 글을 읽으니 그 회포 한이 없어라.

[네이버 지식백과] 닭실마을과 권충재 유적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돌베개)


마지막 단풍이 퇴색되고 있다. 










‘靑巖水石(청암수석)’이라 새긴 허목(許穆)이 쓴 편액(扁額)





한편의 동양화같은 액자풍경


충재 권벌의 공부공간 충재







청암정에서 건너다 본 충재종택



2012년 여름에 찍었던 청암정 여름풍경 


충재박물관

충재의 유물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예문관 검열로 있을 때의 『한원일기』()나 1518년 부승지와 도승지를 할 때의 『승선일기』

() 등 일기 7책을 일괄해서 ‘충재일기’()라 하는데, 보물 제2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는 대개 중종 년간의 것으로

중종실록을 편찬하는 데 자료로 이용되었으며 임진란 이전의 일기는 드문 편이니 매우 귀중한 것이다. 또 『근사록』()4)

고려시대인 1370년에 간행된 것이어서 희귀할 뿐 아니라 권벌이 중종에게서 하사받아 늘 지니던 것으로 보물 제262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권벌이 중종에게서 받은 책을 비롯해 15종 184책의 전적은 보물 제896호이며, 중종이 권벌에게 내린 교서와 이 집안에서 자식들한테

재산을 나누어줄 때 기록해놓은 「분재기」()와 「호적단자」, 1690년(숙종 16)에 그린 「책례도감계병」() 등

고문서 15종 274점은 보물 제901호에, 충재와 퇴계, 미수 등의 서첩과 글씨 8종 14점 등은 일괄해서 보물 제902호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닭실마을과 권충재 유적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돌베개)


“상기 포스팅은 경북 산림휴양도시 봉화군 친환경 울진군 문화 관광 맛집을 알리기 위하여 경북관광공사에서 초청하여 진행한 공공 팸투어에 참가 한 후 후기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