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광주·전라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전설이 얽혀있는 미륵사지 (09. 11. 08)

by 柔淡 2009. 11. 16.

성당면의 교도소세트장에서 나와 다음으로 간곳은 익산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인 미륵사지다.

미륵사지 자체로도 이름이 높은데 금년(2009년) 1월 14일 해체조사중이던 미륵사지 석탑에서 사리장엄이

출토되고 더구나 그안에 명문이 출토됨으로서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먼저 미륵사지에 대해 알아보면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백제 시대의 절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 때 왕이 왕비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져

조선시대 중기 경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배치는 동·서로 석탑이 있고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각각 자리한다. 이것이 복도(회랑)로

구분되어 매우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바닥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조선시대 건물터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어 온돌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토된 유물로는 기와 · 토기 · 금속 · 목재 등 다양하며 글자를 새긴 기와도 많이 발견되었다. 서쪽 금당 앞의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목조건축의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는 미륵사의

복원된 모형이 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사찰로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없어진 동쪽 금당지앞의 석탑을 복원해 놓았다.  

 미륵사지석탑을 해체조사하는 과정에 있어 가림막을 세워 놓았고 여기서 사리장엄이 발견되었다.

 

 

 

 사자사터

사자사는 미륵사보다 앞서 창건된 사찰로서 백제의 무왕과 선화비가 이 사자사로 행차하던 중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미륵사 창건의 계기를 마련해준 점에서 백제 불교사상 중요한 이 절은 위치에

있어서 논란이 있어왔지만 1993년 발굴조사에서 사자사 라는 글씨가 쓰인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사자사터임이 확인되었다.

옛 모습은 찾을 수가 없고 현재는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과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 그리고 창고 등이 있으며 대웅전 앞에 석탑 1기가 남아있다.

 당간지주. 보통 사칠에는 하나만 있는데 이곳은 특이하게 두개가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미륵사지 석탑 남쪽에는 2기의 지주가 동서로 약 90m의 간격을

두고 서 있는데, 크기와 양식, 조성수법이 같아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지주는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마주보는 면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다. 바깥쪽 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띠를 돌린 후, 그 중앙에 한

줄의 띠를 새겨두었다. 당간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하기 위해 지주의 안쪽 면에 3개의 구멍을 각각 뚫어놓았는데, 맨 위의 것만 직사각형 모양

이고 나머지는 둥글다.

대체적으로 장식이 적으며, 단정한 형태를 보이는 이 두 지주는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곳의 당간지주와 거의 같은

모양의 예로는 경북 영풍군의 숙수사지당간지주(보물 제59호)와 부석사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등이 있다.

 

  

 

 

 

 

 

 

 

 

 

 

 

 

 

 

 자료에 따라 복원한 동쪽탑. 중간중간에 누런색 돌들은 예전의 탑에 있던것들을 다시 활용한것이다. 

 풍탁

 

 

 

 

 탑의 제일 상층부에 올려놓는돌

 

 

 이사진은 미륵사지 전경으로 익산시청 홈피에서 가져왔다.


1,400여년전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대 가람이 지금 한꺼풀씩 베일을 벗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