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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백제 무왕의 왕궁이 사찰로 변한 익산 왕궁리유적 (09. 11. 08)

by 柔淡 2009. 11. 17.

미륵사지에대한 설명을 듣고 유물 전사관까지 둘러보니 11시 반이다.

배가 살짝 고프지만 예정되어 있는 오아궁리 유적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기로 한다.

왕궁리까지는 미륵사지에서 직선거리 5km, 비가 계속와서 사진찍기는 어려운 날씨다. 

이곳은 학자들에 따라서 누구의 왕궁인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왕궁이었던 곳이 변해서 사찰이 된것만은

분명한것 같다.

 

왕궁리 유적에 대한 조사

왕궁리유적은 미륵사지에서 직선거리로 5km 쯤 남측에 위치하여 일제시기부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왕궁리5층석탑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965년에는 북쪽으로 기울어있던 석탑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해체보수를 하던 중 석탑의

1층 옥개받침과 기단부에서 금제금강경판을 비롯한 사리병, 불상, 옥, 방울 등의 일괄유물이 발견되어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백제 왕궁터에 대한 부분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왕궁 담장의 외곽경계와 석탑의

북측에서 금당건물터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 후 이 유적은 백제 무왕이 천도한 왕궁으로 주목받게 되었고 일부에서는 별궁

이나 미완의 왕궁설 등을 제기되었고 석탑과 관련된 사찰은 왕궁 내 내불당적인 성격의 사찰로 인식하게 되었다.

왕궁리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미륵사지의 조사가 마무리되어가던 1989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시작하여 현재까지

20년 동안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왕궁의 정확한 규모와 형태, 궁내부의 건물지,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 석축, 금을 가공하던 공방터,

백제시대의 화장실, 탑과 관련된 사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백제 왕궁의 모습이 하나 둘씩 점점 더 구체화 되어가고 있다.  

 

왕궁리 출토유물 전시관 

 내부에 들어가면 여기부터 설명해준다.

 왕궁의 공간활용

왕궁의 남측 전반부에는 왕궁과 관련된 시설을 조성하기 위하여 동서 석축 4단을 쌓고 건물 조성을 위해 대지를 조성하였고 북측 후반부는

기괴한 모양의 정원석과 수목을 심어 후원과 공방지 등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남측 전반부의 왕궁시설은 4단의 석축을 쌓아 남측에서부터 폭 75m와 45m의 대지를 2:1:2:1의 비율로 4개소로 분할하여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에 의해 부지를 조성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부지 내에서는 총21기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백제시대 건물지 14기, 통일

신라 건물지 6기, 고려시대 건물지 1기다.

백제시대 건물지 중에는 제1석축 바로 앞에서 왕궁의 정전 또는 중요 건물로 볼 수 있는 동서 32m, 남북 16m의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이 건물지은 유적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며, 건물의 중심이 남측 중문의 중심축과 일치하여 왕궁 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중요한

건물로 생각할 수 있다. 나머지 백제 건물지들은 제1석축의 뒤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후대의 사찰유적으로 인하여 파괴되어서인지 대부분

유적의 동편에 치우쳐 위치하고 있다.

제4석축의 동편에 치우쳐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이 조사되었다. 이 정원 유적은 왕궁의 후원과 연결되는 부분에 기이한 괴석과 장대석,

하천석 등을 조합하여 물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정원 주변에 정자와 같은 건물지와 제4석축 위로 연결되는 도로도 조사되었다.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들

 

 

 

 

 백제시대 공중화장실 유구가 확인되었다.

 왕궁의 부속시설

왕궁의 부속시설로는 금, 유리, 동의 제련과 제품의 생산시설인 공방지와 대형 화장실, 석축배수 시설을 들 수 있다.
이들 시설은 왕궁의 북서측 낮은 지대에 위치하여 왕궁과는 별도로 운용된 것으로 보인다. 공방지에서는 금연주, 금고리, 금판, 금실,

금못, 금장식 등의 금제품과 유리제품, 동제품과 이들의 제련 과정에서 나오는 찌꺼기인 슬레그, 도가니 등이 출토되어 금, 유리, 동의

생산과 제작이 왕궁 내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알 수 있다.

금은 고대에 가장 귀한 신분계층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서 서동(薯童)이 금을 얻어 백제 제30대 왕위에 올랐다는 삼국유사의 기록

에서와 같이 백제 무왕은 금을 중요시하여 왕궁 내에 생산시설을 두고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형 화장실은 토광을 파고 나무기둥을 세워 발판을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내부에서 회충, 편충 등의 기생충알과 뒤처리를 했던 막대기가

출토되었다. 백제 시대의 대형 화장실은 왕궁리유적에서 처음 확인된 것으로 왕궁의 중심시설과는 별도로 공방지 주변에서 확인됨에 따라

공방과 관련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위생적인 뒤 처리를 위해 설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공방을 재현

 

 

 

 

 

 

 

 

 후원을 꾸몄던 기암괴석

 발굴된 기와흔적들

 담장의 흔적들

 사찰로의 변화

5층석탑과 금당, 강당 등의 사찰관련 유적은 왕궁의 중요 건물이 위치해야할 자리에 있고 석탑의 하부에서 목탑지와 선행한 건물지의

흔적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백제 왕궁의 건물을 철거 하고 그 위에 사찰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즉 왕궁의 용도가 폐기된 후 왕궁의

중요 건물을 파괴하고 그 위에 사찰을 건립한 것이다. 어떠한 연유로 해서 왕궁에서 사찰로 변화되었는가는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무왕 사후 익산 쌍릉(무왕릉,무왕비릉)에 모셔짐에 따라 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나 아니면

백제 멸망 후 무왕 세력의 결집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사찰로의 변화 시기는 『삼국사기』에 「금마군의 대관사 우물이 핏빛이 되어 5장이나 흘렸다」는 기록으로 보면 의자왕대를 전후로

하여 왕궁에서 사찰로 변화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 이와 유사한 대관관사, 관궁사, 왕궁사 등의 사찰 이름이 기록된 명문기와가

출토되고 있어서 이와 같은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아무튼 사찰로 변화 시기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통일신라 후기까지는 경영된 것으로 보이며, 고려시대에는 유적의 동편 일부

지역에서만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고려시대 이전에 유적의 경영이 끝난 것으로 보인다.

 

 후세의 누군가가 왕궁이나 사찰터인줄 알면서 조상의 묘를 모신것 같다.

유적의 발굴을 위해 조만간 분묘이장을 해야 한단다.

왕궁리5층석탑

 국보 289호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益山王宮里五層石塔)은 백제석탑 양식을 충실히 따른 통일신라말 또는 고려 초기의 석탑이다.

석탑의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지만 탑 주변에서 「관궁사」, 「대궁」 등의 명문기와가 수습되어 궁성과 관련된 사찰이 건립되는

과정에서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몇해 전까지 기단부가 파묻혀 있어 토단(土壇)처럼 되어 있었으나 1965년 11월∼1966년 5월의 해체 수리 때에 원형이 복원되었다.

발굴에 의하면, 탑기(塔基) 네 모서리에 8각의 부등변 고주형(不等邊 高柱形) 주춧돌이 놓이고, 이 우주석(隅柱石) 사이에는 길고

큰 돌을 몇 단 쌓아 올렸으며, 우주석이 1층 옥신(屋身)의 우석(隅石)을 받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근처에서 갑석(申石)·
면석(面石)들의 부서진 돌이 많이 발견되어, 각 면에 탱주(撑柱) 2개씩이 있는 단층 정4각형 기단임이 밝혀졌다. 이렇게 부서졌기

때문에 일부를 보강하는 한편, 토단(土壇)을 쌓아서 보호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옥개석(屋蓋石)이 모두 몇 장의 돌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 옥신은 우주가 새겨진 기둥모양의 4우석(隅石)과 탱주가

새겨진 중간석(中間石)으로 되어 8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2층은 4면이 각 면 한돌씩이고, 3층 이상은 2개씩의 돌로 되어 각각

우주형(隅柱形)이 표시되어 있다. 옥개석은 매우 넓은데, 받침과 지붕이 각각 딴 돌로 되어 있다. 받침은 각 층 3단으로 4개씩의 돌로

짜여 있으나 등분(等分)되지는 않았다. 개석(蓋石)은 1층부터 3층까지 8개의 돌로 되고, 4·5층은 4개이다. 추녀는 얇고 추녀밑은 수평이나
우각(隅角)에서 가벼운 반전(反轉)을 보여주는 곳에 밑으로 풍령공(風鈴孔)이 뚫려있다. 옥상(屋上)의 경사는 완만하고 전각(轉角)의

반전곡률(反轉曲率)도 경미한데, 옥신을 받치기 위하여 딴 돌을 끼워 놓았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부발(覆鉢)·앙화(仰花), 그

리고 부서진 보륜(寶輪) 1개가 남아 있다.

출토된 유물에는 백제시대 기와류인 연화문수막새, 태극문수막새, 소문수막새와 토기류인 대형 항아리, 왕, 시루 등이 있고 인장토기편,

손잡이 달린 이형토기, 변기형토기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녹색 유리편, 유리구슬과 함께 금사, 금구슬, 금사뭉치, 금제화형장식 등의

금속제품이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