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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1,400년만에 벗겨진 비밀,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09. 11. 08)

by 柔淡 2009. 11. 16.

백제의 무왕과 선화공주의 전설이 전해내려오는 미륵사지엔 다쓰러져 가는 석탑이 한기 남아 있었는데 너무 붕괴위험이 높아

2002년부터 해체 보수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이탑은 우리나라 최초, 최대의 석탑으로 국보11호로 지정되어 그 중요성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그런데 2009년 1.14일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이 석탑의 기단 한가운데 있던 돌기둥 기단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금제사리호를 비롯한 683개의 유물이 뿐만 아니라 함께 봉안된 금제사리봉안기에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적혀있었다. 

 

연합뉴스의 기사를 인용해 본다.

창건 시기와 내력이 설화성 짙은 기록으로만 전하는 전북 익산 미륵사가 설화처럼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재위 600-641년) 때

그 왕후가 창건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설화에서는 무왕과 그 왕비인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善花)가 같이 사찰을 중건했다고 했지만,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백제 당시 기록에서는 그 왕비가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佐平)의 딸이라는 구절이 발견돼 주목된다

나아가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무왕 재위 시대의 기해년(己亥年), 즉 서기 639년(무왕 재위 40년)으로 나타났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지난 14일 석탑 1층 심주(心柱) 윗면

중앙에서 사리공(舍利孔)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무왕 왕후가 조성한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고 19일 밝혔다.

백제 사리장엄구는 2007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부여 왕흥사지 목탑터 출토 창왕(昌王) 시대(577년) 제작품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 발견이다. 1995년 부여 능산리 절터의 목탑터에서도 같은 창왕 시대(567년) 석제(石製) 사리감(사리를 안치하는 시설)이 발굴

됐으나 사리장엄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사리공에서는 사리를 담은 금제 사리호(舍利壺)와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 백제 특유의 머리꽂이

장식인 은제 관식(冠飾) 등 각종 유물 500여 점이 수습됐다.

이 중 미륵사 석탑 자체는 물론이고 미륵사라는 사찰 창건 내력을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유물인 금제 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金板)을 이용해 글자를 음각(陰刻)하고 주칠(朱漆)로 썼다.

글씨는 앞면과 뒷면에서 모두 확인됐다. 앞면에는 1행 9글자씩 모두 11행에 걸쳐 99자를 새겼으며 뒷면에도 11행에 걸쳐 모두 94글자

를 적었다.

아직 완전한 판독과 해석이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백제 무왕의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에 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나아가 이 기록에는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라는 구절이 발견됐다.

이 구절은 판독자에 따라서는 "백제 왕후와 사택적덕의 딸"로 읽는 견해도 있어 그 정확한 해석은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사택'은 당시

백제의 8대 성(姓) 중 하나다.

삼국유사에서는 미륵사를 창건한 주체를 백제 무왕과 그의 왕비로,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라고 기록했다.

연구소는 이 금판이 발굴됨으로써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 연대 등이 정확하게 드러났고, 아울러 문헌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은 물론 이 시대 백제의 서체(書體)를 연구하는 데도 커다란 획을 긋게 됐다"고 말했다.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금제 사리호는 사리공 중앙에서 발견됐다. 높이 13㎝, 어깨 폭 7.7㎝의 작은 병 형식이며 보주형(寶柱形) 뚜껑을 덮었다.

X선 내부 투시 결과 내함(內函)과 외함(外函)의 2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했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사리호 표면에서는 다양한 문양과 세공(細工) 기법이 드러나 당시 백제 금속공예가 절정에 달했음을 입증했다.

연구소는 "이번에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각종 공양품이 일괄로 출토된 데다 가공수법 또한 정교하고 세련되어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유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번 발견으로 백제 석탑의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가 새롭게 드러나고, 더불어 공양품으로 함께 묻힌 은제관식을 비롯한 유물들이

다량으로 확인되면서 그 묻힌 연대가 확정됨으로써 다른 지역에서 이와 같은 유물을 출토한 백제 유적의 축조 시점을 판정하는 데도 결정

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연구소는 "이번 미륵사 석탑 사리장엄구 발견은 무령왕릉 발굴과 부여 능산리 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원래의 미륵사지 석탑이 있던 자리에 해체 보수를 위해 가건물을 세워 놓았다. 

 가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석탑을 해체해버려 이런 기단만 남아잇다.

 가운데 있는 정사각형 기단이 사리장엄이 들어있던 기단이다.

 한쪽벽면에는 사리장업출토에 대한 내용들이 사진과 함께 걸려있다.

 

 

 

 

 

 

 

 

 미륵사 석탑 사리장엄구 발견은 무령왕릉 발굴과 부여 능산리 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라고 한다.

차후에 복원을 위해 서부재를 번호를 매겨 한족에 쌓아 두었다.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석인상

 

 

 2층으로 올라가면 사리고이 있던 기단의 윗부분을 더 자세히 볼수 있다.

 1,400년전 우리조상들의 흔적이 그대로 발견된 미륵사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글들이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들을 적어 놓은것 이라는게 밝혀졌다. 다만 무왕과 선화공주, 오앙비로 표현된 사택적덕의 따님에 대한

연구가 더 진척이 되어야 하겟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