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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징검다리 1박2일 고향방문 이벤트] 2 - 제천 배론성지 (09. 12. 19)

by 柔淡 2009. 12. 22.

탁사정에서 한시간 정도 머문후 다음으로 찾은곳은 배론성지이다. 탁사정에서 차로 10분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배론성지 (제천관광 홈페이지 인용)

배론 성지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천주교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성지로 1801년 신유박해때 많은 천주교인이 배론 산골로

숨어들어 살았는데 그들은 옹기장사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황사영이 당시의 박해상황과 천주교 신도의 구원을 요청하는 백서를 토굴

속에 숨어 집필한 지역이며 1855-1866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요셉신학교가 소재했던 지역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중의 한명인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의 분묘가 소재한 지역이다.

아울러 1866년 병인박해의 첫 순교자인 남종삼 묘소가 배론 성지와 인접한 학산 리에 있다.
근대에 이르러 1958년 원주교구에 속하여 원주교구장이 개발 착수하여 진입로를 비롯한 성지일원을 말끔히 정리하고 단장하였다.

* 배론 이란? - 배론 이란 지명은 골짜기가 배 밑 바닥 같다 고하여 한자 새김으로 주론(舟論) 또는 음대로 배론(排論)이라고도 합니다.
* 백서 - 가로 62cm, 세로 38cm되는 흰 명주 비단에 한줄에 110자씩 122행 13,384자로 작성되었으며 원본은 로마교황청 문서보관소에

            보관중입니다.

1965년에 영세를 받은 천주교 신자인 내가 제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75년까지는 배론성지에 대해 잘 알지 못했었다.

사실 그때는 배론성지가 지금처럼 개발되지 않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이 성지를 자주 찾으시는데 매주말 여행을 다니는 나는 이핑게 저핑게 대고 성당을 찾은지 오래되었다.

언젠가는 돌아가야할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지만 아직은 좀.....

 

 

 

안내도

 

 

 

사제관

 성모동산

 성직자 묘소와 십지가의길 올라가는길

 1855년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신학교

 

 배론본당

 성요셉경당

 

 

 

 황사영 순교현양탑

황사영은 처삼촌 정약종이 들려준 천주학에 매료되어 1790년에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고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한 후 알렉시오(Alexius) 라는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한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최인길의 집에서 주 신부를 만나고부터는 벼슬길을 버리고 전교사업에 힘을 기울인다.

1798년 서울로 이주하여 살면서 신자 청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한문으로 된 교회서적을 번역하는 등 활동적인 교회 지도자로

부상한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박해를 피해 배론으로 피신하여 황심, 김한빈, 송재기로부터 박해의 진행사항을 들었고 교회의 재건

방안을 생각하거나 글 쓰는 일로 소일한다. 그 해 8월 23일 황심으로부터 박해의 소식과 주문모 신부의 순교사실을 듣고는 박해의

경과와 교회 재건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비단에 적어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려고 백서를 쓰기 시작한다.
황심이 9월15일 체포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되었으며 백서는 압수된다. 황사영과 관련자들이 순교한 후 백서 사건은 종료되지만

박해로 인해 많은 순교자가 생겨난다. 하지만 한번 전파된 천주교 신앙의 불꽃은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빠르고 더 넓게

온 나라 구석구석으로 전파되어 갔다.

 피정의집

 최양업 도마신부 기념성당

 

 

 최양업신부님

땀의 순교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1821-1861년) 신부는 두 번째 한국인 사제로서, 세례명은 토마스. 양업(良業)은 아명(兒名)이고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본관은 경주, 충청도 다락골[일명 대래골, 현 靑陽郡 化成面 禮岩里]에서 출생하였다.

 

1. 생애

최양업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최경환(崔京煥)과 이성례(李聖禮)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과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 이존창(李存昌)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했었다. 본시 서울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洪州)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출생하였다.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일가와 친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간).

 

다락골에서 점차 생활이 넉넉해지고 또 외교인 친척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신앙생활이 해이해지자 최경환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

하고자 형제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같이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3년 만에 천주교 집안인 것이 탄로되어 서울을 떠나야 했는데 이 때 최경환은

과천(果川)의 수리산 뒤뜸이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그는 산지를 개간하며 연명해 나아갔다. 최양업은 16살이 되는 해에 이 곳 수리산에서 신학생

으로 선발되었다.

1836년초 입국에 성공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즉시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생 선발에 착수했는데, 맨 먼저 최양업이 발탁

되었고, 이어 최방제(崔方濟)와 김대건이 발탁되었다. 최양업 등 세 소년은 서울의 모방 신부 곁에서 라틴어를 배우며 출발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모방 신부는 그들을 국외로 내보내어 성직자로 양성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연일게속되는 한파와 겨울철 산속이라 해가 일찍 넘어가니 날씨가 너무추워 오래 머물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십자가의 길과 로사리오의 길을 돌아보지 못했다. 아마 봄이나 가을에 다시한번 와야 할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