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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울산울주]경술국치 백년만에 다시돌아본 임진왜란의 아픈흔적, 서생포왜성

by 柔淡 2010. 4. 7.

올해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으로 부터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데 요즈음 일본이 모든 교과서뿐만 아니라 외교정책서인 외교청서에 독도가 자기나라 땅이란는 말도 안되는 문구를

집어넣어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은 도저히 화해할수 없는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울산여행에서 작년여름에도 돌아보았던 서생포 왜성을 다시 돌아봤다.

작년에 처음 이곳을 왔을때는 마음속에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임진왜란 7년전쟁이 그저 전투만 있다가 끝이난 전쟁인줄

알았었는데 우리역사책 어느곳에서도 배운적이 없는 왜군이 쌓은 성곽들이 아직도 튼튼하게 우리나라 남쪽지방에 남아있고

그게 이 서생포 왜성 하나만이 아니라 기장 죽도성과 부산진성, 울산왜성 등 여러개 된다는 사실을 알고나서다.

더구나 지금도 많은 일본인들이 여기를 돌아보기 위해 자주 찾고있고 우리가 갔던 그날도 몇명의 일본인 관광객들을

볼수 있었다. 

 

먼저 서생포 왜성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면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리에 있는 이 성은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때 왜장 가또기요마사가 돌로 쌓은 왜성이다. 기장죽도성과

부산진성, 울산왜성과 봉화로 서로 연락하였다하여 일명 ‘봉화성’이라고도 부른다.
산정상에 본성을 두고 동북쪽 경사진 외곽에 2∼3겹으로 높이 6m의 성벽을 계단식으로 다시 쌓아 성 전체를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놓았다. 이것은 각 구역이 독립적인 전투를 할 수 있도록 한 왜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성안에는 중간지점에 선조 32년(1599)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애국지사 위패를 모셨던 창표당 터가 남아 있으며, 본성 맨 서쪽에는

장군수라는 우물터가, 외성 남쪽에는 병사들의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터가 있다.

이 왜성은 비록 일본이 축성했으나 후에 우리측에서도 사용했던 성으로, 남문 일부의 훼손을 제외한 다른 곳은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16세기말의 일본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마을과 접해있는 성 입구 

 

 

자료를 찾다보니 위키백과에 자세한 내용이 있어서 옮겨본다

 

왜성은 일본군이 남해안 일대 혹은 그외 지역을 점거하고 그들의 근거지를 확보하거나 일본군내 상호 연락 등을 위해 축조한 일본성곽으로써,

그 성격으로 보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연결성(連結城)[1]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령에 의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나중에는 의주까지 히데요시 자신이 명나라로 들어갈 때의

거처(御座所)와 군수물자의 보급로 확보를 목적으로 쌓은 성곽이다. 이것은 일명 “쓰타이노시로”(つたいの城)라고도 하는데, 군대가 거의 하루에

행군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쌓았으며, 주로 조선의 읍성을 고쳐서 사용하거나 적당한 읍성이 없는 곳에서는 새로이 간단하게 축성했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그 유구의 위치가 확실하지 않으며, 함경도길주안변 사이 등에도 쌓여져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길목마다 이 연결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는 통치성(統治城)[2]인데, 대한민국 남해안(경상남도전라남도 일부)지역에 쌓은 성곽으로, 임진왜란기인 1592년부터 2년간에 걸쳐 일본으로

부터의 수송로 확보와 일본군이 내륙에서 후퇴한 뒤 전세를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쌓은 10여개의 성곽정유재란기에 신규로 축성한 8개 등 20여

개의 성이 그것이다.[3]

구조 [편집]

남해안 일대 왜성은 30여개로 약간의 차이점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일본의 성곽축조양식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이들 왜성은 16세기 일본에서

축조되기 시작하는 평성이 아니라 대부분 산성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정치적 지배 거점에 중점을 둔 평성보다는 전시 사황에 맞게 방어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진과 후퇴, 보급이 원활할 수 있는 강이나 바다에 인접한 곳에 축조하였다. 또, 성의 구조는 일본의 성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구루와의 배치와 해자, 이중문으로 된 마스가타와 마스가타에 딸린 우마다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일본의 성의 모습은 당시 중국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과 일본인 화가가 울산성 전투를 그린 병풍화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이들 그림에서는 담에 난 총안인 사마를 통해 조명연합군에게 사격하는 일본병사와 겹겹으로 된 일본의 성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4]

구루와 [편집]

일본의 산성이 대체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듯이 왜성 역시 마찬가지로 주곽부를 중심으로 지형을 이용하여 다중의 구루와의 배치 등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구루와의 배치는 지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지만 구조적 원리를 간략화한다면 흔히 말하는 윤곽식(輪郭式)ㆍ제곽식(梯郭式)ㆍ

와곽식(渦郭式)ㆍ연곽식(連郭式) 등으로 나눌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 변형인 경우가 많다.

고구치 [편집]

일본의 성에서 출입구를 통상 고구치(虎口)라고 칭하는데, 왜성 또한 그 모양은 다양하지만 기능은 하나같이 출입구를 통과하는 적에게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한국의 경우는 옹성(甕城)이나 적대(敵臺)에 의해 주로 출입구인 성문이 보호되는 것과 비교가 된다. 그리고 구루와에 여러 모양의

각도(角度)를 주어 성벽으로 오르는 적을 원근(遠近)ㆍ좌우(左右) 등 다양한 위치에서 궁시 등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요코야가카리

(일본어: 橫矢 횡시[통용][*])이다. 이런 직선(直線)과 각(角)으로 이루어진 구루와형태는 일본 성곽의 독특한 점 가운데 하나이며, 한국의 경우 성벽이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일본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많지 않고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요코야가카리처럼 구루와에 각도를 주는 방식보다는 성곽 외각으로

사각모양의 치성(雉城)을 만드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석벽, 성루 [편집]

일본의 경우 축성에 석벽방식을 도입한 것은 중세이후로 볼 때는 전국 시대 후반기이다. 물론 고대에는 조선식산성과 같은 석축성이 있지만 중세이후로는

거의 석벽이 사용되지 않았다. 석재확보나 기술적인 문제 등도 있겠지만 성곽의 항구성이나 방어력 증강의 필요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왜성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바이지만 일본성곽은 석축에 있어서 직선을 중시하는 경향이 현저하다. 따라서 구루와가 꺽이는 모서리 부분이 매끄럽게 처리

되면서 전체적으로 상하석축선이 곡사선형태로 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자연석을 난적(亂積)하고 그 틈을 잔돌로 메우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또한 성루의 경우는 중세이래 산성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구루와위에 시설하고 그위에 다시 목책이나 판벽을 설치하여 방어하는 경우

가 종종 있었다.

 

 

 작년에 이어 이번 울산팸투어때 울산의 모든것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안내해주신 울산의 이삼가마 문화해설사님.

울산에 대한 사랑과 울산의 문화, 역사, 유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신 분이다.  

 성의 중문 입구

 일본의 성마다 표시되어 있다는 특이한 표식

 

 

 

 가장 윗부분, 정상부분의 성곽

 

 임진왜란 당시 전투중에 사용했다는 조약돌

 서생포 왜성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일본식 평산성이다. 본성과 지성으로 구분되어 구획되어 있다. 성벽은 외성(外城)의 경우 바깥쪽에만 돌로 쌓는 내탁식(內托式)

으로 하고, 내성(內城)은 안과 밖 모두를 돌로 쌓는 협축식(夾築式)으로 축조하였으며, 기울기는 지면에서 60˚내외이다. 서생포왜성은 16세기 말기의

일본 성곽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일본식 성곽은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의 성곽 축조에도 일시 응용된 바 있다. [1]

본성 [편집]

모성(母城) 혹은 내성(內城)이라고도 구분한다. 회야강 강구의 작은 포구를 끼고 해발 133m 고지의 산정(山頂)에 혼마루를 축조하고 아래로 동쪽

경사면을 이용하여 복잡한 구조의 아래로 니노마루, 산노마루를 겹으로 두르고,[1] 동북쪽 경사진 외곽에 약 6m의 노보리이시가키를 계단식으로

축조하여 본성과 연결해 놓고 있다.[2]이것은 각 구루와에 독립적인 전투를 할 수 있도록 한 왜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1] 그 아래로 산 아래까지

점차 길고 넓어지는 지성(支城)을 배치하였다.

본성에는 장군수와 천수각이 있다. 그리고 북문과 서문도 본성에 있다. 장군수는 옛날에 이곳에 머물렀던 일본군 장수들을 위한 우물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주위 성벽이 파괴되면서 우물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천수각 [편집]

천수각일본의 성에서 상징적인 건물로써 성곽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평소에는 왜장이 머물고 전쟁 때는 전쟁을 지휘하던 곳이다.

이곳은 돌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하는데 천수의 흔적은 없지만 돌계단은 아직 옛 모습 그대로 있다. 천수에서 주위를 보면 산이 있는 서쪽을 제외하고는

모든 방향이 트여있어 좋은 전략적 위치라는것을 알 수 있다.

성문 [편집]

서문은 성 전체로 보면 남쪽 방향이다. 지형적으로 보면 이 문을 나서면 해안으로 갈 수 있어 일본군이 가장 많이 드나들었을 문으로 생각된다.

기록을 보면 이 성에는 문이 여럿 있는데 오직 서문만 살아 나올 수 있는 문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이 지역이 서생면이 된 것도 이 문과 연결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북문은 '죽음의 문'으로 불린다. 북문은 천수각 바로 위에 있다. 그런데 이문은 문의 이름만 있지 실제로 문은 없다. 따라서 옛날에 서생포

왜성에 들어왔던 적병 중 이곳이 문인 줄 알고 탈출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고하여 '죽음의 문'으로 통한다.

지성 [편집]

자성(子城) 혹은 외성(外城)이라고도 한다. 지성에서 본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해발 니노마루산노마루를 지나야 한다. 니노마루산노마루

있는 곳에도 해자가 있어 적이 쉽게 접근을 못하게 되어 있다. 아울러 이 성은 동서로 또 다른 성과 연결시켜 놓았다.

창표당 [편집]

창표당은 서생포왜성에서 일본군과 전쟁 중 전사를 한 우리 장병들을 위해 선조 32년(1599년)에 세운 사당이다. 창건 당시의 창표당에는 위패를 봉인한

본당 등 건물이 여럿 존재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배 밭에 울산시가 세워 놓은 표지판만 있을뿐이다.

동제당 [편집]

동제당은 서생포왜성을 점령할 때 공을 세웠던 명나라 장군 마귀의 위패를 모신곳이다. 또 성 동문에는 서생포왜성에서 전투를 벌였던 명나라 장군

편갈송이 정전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귀화한 후 이곳에서 여생을 보낸거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기념비를 세워놓고 관리를 하고 있다.[2]

해자 [편집]

성벽 밖에는 2, 3중으로 해자를 둘렀다. 성곽의 전체 면적이 해자를 포함하여 46,000평에 이르고 해자를 제외한 성 외곽부의 길이가 약 2.5km,

평면상의 직선 거리는 동서 약 870m, 남 북 약 370m에 달해 남해안 각지에 산재하는 왜성 가운데 가장 웅장하다. 성의 내외부에는 다수의

우물터가 확인된다.

일본 성곽의 특징인 천수각이 있었다는 흔적 

 

 인짐왜란 당시 울산성 전투를 묘사한 일본의 병풍

 

  

문서에 서생포왜성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593년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서(朱印狀)에 의한 축성명령이며, 같은 해 5월 히데요시 명령서에

성 이름을 알 수 없는 성의 수비에 가토 기요마사, 그 수비장에 사가라 나가쓰네(相良長海)가 명령되어 있는데, 한성(서울)에서 퇴각한 가토

기요마사는 그대로 서생포에 들어가 축성을 개시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구체적인 일시는 알 수 없지만, 1593년에 본격적인 축성이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3]

같은해 9월의 히데요시의 명령서에는 "강화에 방심하지 말고 성을 견고히 하라"고 명령되어 있는데, 이러한 일련의 명령서로 보아 서생포왜성은

가토 기요마사의 손에 의해 보이는 성의 원형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추정된다. 1594년에는 평화교섭이 활발히 진전되어 4월에 서생포왜성에서

사명대사와 가토 기요마사가 회견을 하였다.

1595년 6월 28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의해 부산왜성, 죽도왜성, 가덕도왜성 등의 몇 개를 남기고 여러 장수를 순차 일본으로 귀국시켰는데,

이때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왜성에서 기장의 죽성리왜성으로 옮겼고, 이때부터 한때 폐성이 되었다. 1596년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가토 기요마사는

귀국하여 후시미(伏見)로 향했는데, 같은 해 9월 평화교섭이 결렬되자, 1597년 1월 가토 기요마사는 다시 1번대가 되어 약 1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입, 기장과 양산을 거쳐 한때 폐성으로 되어 있던 서생포왜성에 입성했다.[4]

이 이후 가토 기요마사는 이 방면의 군사적 책임자가 되고, 같은 해 2월 21일자 히데요시 명령서에 수비 책임자로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에게

3,000명의 재번을 명령하고 있다. 같은해 3월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왜성에서 사명대사와 회담을 했다. 같은 해 7월 21일경에 아사노 요시나가

서생포왜성에 입성하고, 가토 기요마사는 북위작전을 위해 출진하고, 같은 해 9월 아사노 요시나가는 혼마루의 토목공사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5]

같은 해 10월말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왜성으로 돌아와서, 지금까지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던 서생포에서 북동쪽으로 약 35km, 떨어진 울산에

최전선인 울산왜성이 생기면 일본군의 점령지 수비는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았는데, 같은 해 11월 10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의해 축성된 것이

울산왜성으로, 12월 중순 이후 성의 외곽부분이 거의 완성되었을 무렵, 울산왜성은 갑자기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1597년 12월 22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 약 보름동안 비참하고 처절한 울산왜성에서의 농성전이 벌어진 것이다. 같은 해 1월 22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의해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왜성의 수비만 전념케 하고, 서생포왜성에는 모리 가쓰노부, 시마즈 다다토모, 이토 스케타카, 다카하시 모토타네,

 아카즈키 타네나가, 사가라 나가쓰네 등 여러 장수가 입성하여 수비를 담당하게 되었다.[6]

 

1598년 5월 22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의해 지금까지 구포왜성에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가 서생포왜성에 수비담당자가 되어, 이후 폐성까지 나가마사가

지키고 있었다. 같은 해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인해 더 이상 이 전쟁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10월 15일자 고다이로(五大老)가 나가마사

앞으로 보낸 명령서에서 "울산이 공격을 당할 때는 서생포를 단단히 지킬 것, 비상시에는 서생포성을 버리고 부산성으로 빠져나갈 것"을 명령하고 있다.

10월 27일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서에는 "기요마사와 협의하여, 서생포성을 퇴각하여 부산성으로 입성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11월 24일에 기요마사와

나가마사 등이 부산왜성에서 일본으로 귀국길에 오르자, 명나라의 제독 마귀가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에 입성. 점령했다.[7][8]

서생포진성 [편집]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서생포와 부산의 다대포에 동시에 쳐들어와 서생포에는 서생포 만호진성(西生浦萬戶鎭城)에 만호(萬戶)를

두었으나, 이를 지키지 못하고 무너졌다. 임진왜란 후, 서생포 만호진성의 수군만호는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로 승격되었으나, 일본군이 축조한

서생포왜성의 성곽이 견고하다 하여 수군동첨절제사를 인근의 서생포왜성으로 이동하게된다. 이래 서생포 만호진성은 폐성이 되고, 서생포왜성은

대진(大鎭)으로 승격되어 1895년(고종 32)까지 서생포왜성은 조선의 서생포진성(西生浦鎭城)으로 사용되었다.

 

1872년에 제작된 『울산서생진지도』(蔚山西生鎭地圖)를 보면 서생포왜성의 외성(外城) 내부의 관청건물, 그리고 주변 지역의 마을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서생포진성의 남문 근처에는 시장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고 전선이 정박해 있는 수군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서생포 왜성의 외성이 대촌(大村)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명대사 소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집하여  서산대사의  휘하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왜군에게  빼앗긴  평 양을  되찾는 한편,  

권율과  힘을 합쳐  의령에서  왜군을  물리 쳤다.  정유재란 때에도  울산에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쳐  공 을  세웠으며, 1604년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강화를 체결하고  왜군에게 잡혀간  3천5백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돌 아왔다.  

그 후 해인사에서  도를 닦다가  결가부좌한 채 죽음을  맞았다.  저서- <사명당집

 

서생포 왜성에서 사명대사가 가토기요마사와 여러차례 회담을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밀양의 표충사에서 승군을 훈련하고

해인사에서 입적한 이유가 서생포 왜성과 관계있는게 아닐까?

경술국치 100년을 맞이하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임진왜란의 와중에도 당당하게 적진에가서 회담을 하고 종전후 일본에 가서 포로로 잡혀갔던

우리백성들을 구출해온 사명대사의 당당함과 지혜를 배워야만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