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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서울종로]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삶의 흔적이 녹아있는 운현궁

by 柔淡 2010. 10. 19.

인사동을 가거나 창덕궁을 갈대마다 수도없이 지나쳤던 운현궁을 이번에 처음으로 들어가 봤다.

그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건성으로 지나치면서 조선시대 궁궐중의 하나였겠구나라는 출처가 애매한

나름대로의 상식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기회에 확실하게 알게되었다.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로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한국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크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다.

고종이 12살까지 살았던 운현궁은 철종 때 옛 관상감 터였던 운현궁에 왕기가 있다는 내용의 민요가 항간에 유행하였으며, 고종이 등극한 후 대원군이 운현궁 터를 다시 확장하였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書雲觀)이 있는 그 앞의 고개 이름이었으며, 서운관은 세조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그대로 통용되었다. 서운관의 명칭인 운관(雲觀)과 운관 앞의 고개를 가리키는 운현(雲峴)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고종의 잠저는 당시 대왕대비 교지를 받들어 영의정 김좌근, 도승지 민치상, 기사관 박해철·김병익 등 일행이 명복(明福-고종의 이름)에게 익종의 대통을 계승토록 하기 위하여 고종을 맞이하러 최상급의 가마행렬을 갖추어 관현(觀峴)의 흥선군 사저에 갔을 때 흥선군의 위엄 있는 자세와 그의 둘째 아들인 명복의 천진스러웠던 모습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서 운현궁이 고종의 잠저였음을 알 수 있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관리하는 일은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아했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다. 이후 그 소유권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적 공방이 있었으나 그 해 9월 21일 결국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 1936- )씨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되었다.

그러던 것이 1991년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면서 양도 의사를 이청씨가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되었고,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것이다.
 

 노안당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가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되었다가 환국한 이후 민씨 척족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유배

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한 곳이 이 건물이고, 만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노안당은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노안당의 상량문이 1994년 5월 27일 보수공사 당시 발견되었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

및 지위에 관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상량문에 의하면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閤下)'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또 노안당의 당호는 공자가 '老者를 安之하며'라고 한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노락당과 노안당 증축 당시 대원군의 권세를 이처럼 상량문에서도 잘 대변하고 있다.

 

노락당 못지않게 운현궁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4대문이었다.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정문, 후문, 경근문(敬覲門), 공근문(恭覲門)의

4대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아 있다.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다.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등극했을 때 조종대신들이 왕의 심중을 헤아려서 왕실 예산으로 경근문과 공근문을 지었다고 한다. 이 때 고종은 호조판서

이돈영에게 품계를 올려주고 치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공근문은 대원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 전용한 문인데 경근문과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일본문화원 옆 터에 그 기초만 남아있다.

 입구의 담벼락에 붙은 안내플래카드. 매주말 예술마당 행사가 열린다.

 오른쪽 벽에는 게시판이 있어서 그때그때 열리는 행사를 알수 있다.

 대문. 예전에는 후문이었다고 한다.

 

 고종이 즉위(1863.12.13.)한 지 한 달쯤 지나서 대왕대비의 하교로 운현궁의 신ㆍ증축 공사는 시작되었고, 9개월 만에(1864. 9.)

노락당과 노안당 건물의 준공을 보았다.

당시 대왕대비는 호조에 명하여 운현궁에 매달 쌀 10섬과 100냥씩을 보내고, 운현궁의 신증축 비용으로 17,830냥을 지원하였다.

운현궁이 준공되었을 때 고종은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모시고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하였다. 이 때 고종은 자신이 그 곳에서 살던 때를

생각하여 근처의 선비와 소년들에게 임시과거시험을 보게 하고 선비 50명, 소년 497명을 선발해서 시상하는 등 운현궁의 준공을 기념

축하하였다.

 

본래 흥선군의 사저였을 때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증축하여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위 담장 길이가 수리(數理)나 되고 4개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처럼 엄숙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 舊TBC방송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라고 한다.

운현궁의 대표적 건물로는 고종원년(1864) 9월에 준공한 노락당과 노안당 그리고 6년 후에 증축한 이로당이 있고, 지금은 한 개뿐이지만

그 당시 4개였던 대문이 있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는 궁궐에 비하여

손색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였다.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던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노락당기(老樂堂記)'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했던 사실만으로도 노락당이 상징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병학은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 된다고

했는데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해도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천하제일이었다는 것을 잘 웅변하고 있다.

 

대원군의 위세와 운현궁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는 고종 3년(1866) 3월 21일에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를 운현궁에서 치른 사실이다.

가례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하였음은 물론이다. 당시 가례행사를 위하여 1,641명의 수행원과 700필의 준마가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모두

운현궁을 거쳐 갔다고 할 때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종로에 있는 옛건물들은 사연이 없는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