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서울]4대궁궐 단풍의 절정을 보다 - 12, 경복궁 향원정 일대

by 柔淡 2010. 11. 18.

서울의 4대궁궐에서 단풍이 특별히 아름다운곳이 한곳씩 손꼽히는데 경복궁은 향원정 주변이 손꼽힌다.

향원정은 겨울의 설경도 아름다워 해마다 달력사진의 첫머리에 등장하기도 한다.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
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작년에는 연못주변의 모든 단풍이 빨갛게 물들었었는데 올해는 연못 오른쪽의 단풍나무만

예쁘게 물들었고 건청궁쪽의 단풍은 나무에서 누렇게 말라 버렸다. 

 

 

 

 

 

 

 

 

 

 

 

 

 

 

 

 

니콘으로 찍은 사진들

 

 

 

 

 

 

집옥재, 협길당, 팔우정 이 3채의 건물은 당초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 전각들도 옮겨온 것이다. 고종은 이 건물들을 어진의 봉안 장소와 서재 겸 외국사신 접견장으로 사용(1893년 한 해에만 영국, 일본,

오스트리아 등 외국 공사들을 다섯 차례 접견)하였다.
이 3채의 건물은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신식이라고 생각되던 중국풍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집옥재의 현판을 송나라 명필인 미불(米連, 字 元章)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중국풍으로 만든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된 비운의 건청궁

 

경복궁이 중건되고 5년이 지나서 고종 10년(1873년)에 와서 지어진 건물이다. 경복궁에서 가장 북쪽 한적한 곳에 위치한다.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면서 거처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앞에는 향원지라는 큰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 정자를 꾸몄다. 건물은 민간 사대부 집의 형태를 따르면서

화려하고 섬세한 치장을 가미하여 지었다. 왕이 사용하는 장안당과 왕비가 머무는 곤녕합, 그리고 장안당 뒤에 서재로 관문각을 지어서 마치 사대부가의

사랑채, 안채, 서재를 연상시키는 구성을 하였다

 

담장에는 벽돌을 이용해서 아름다운 꽃무늬를 꾸몄다. 고종은 이곳을 좋아하여 왕비와 함께 자주 머물렀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지 않을 때에는 역대 임금의

초상화를 모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가롭게 휴식할 목적과는 달리 이 건물은 조선말기 정치적 혼란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고종은 이곳에서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공사들을 접견하면서 여러 정치적인 문제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 사이에 서재인 관문각은 러시아인에 의해서 2층

벽돌조 건물로 개조되기도 하였다. 궁 안에 최초로 전등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1895년 일본인들이 궁궐을 습격해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은 이 건물 곤녕합의 누마루인 옥호루였다. 이 사건 이후 건물은 한 동안 방치되었다가 철거되고

말았으며, 2006년에 와서 다시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경복궁에서는 향원정 주변 외에는 단풍나무를 구경하기가 힘들다.

이제 덕수궁으로 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