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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단양]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사랑이야기 무대, 온달산성

by 柔淡 2011. 5. 30.

단양 영춘은 정감록이란 책에 나오는 10승지지중 한군데이다.

단양 영춘이 나에게는 인연이 깊은곳이다. 고향이 이북이셨던 아버님은 일찍 남쪽으로 오셔서 생활하시다가
6.25전쟁이 일어나자 정감록에 나와있는 십승지지인 단양 영춘땅으로 피난하셨고,
어머님은 일제시대에 여학교를 졸업하시고 영춘에서 잠깐 선생님으로 근무하셨던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학생시절에는 영춘이 워낙 교통의 오지여서 찾아가는것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온달산성이 지금처럼 정비 되지도 않아서 오르기도 어려웠다.

 

《삼국사기》 온달전에 의하면, 공주는 어릴 때에 잘 울어서, 왕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하였다. 그 뒤 커서 시집갈 나이가 되었을 때, 왕이 명문귀족 집안에 시집보내려 하였지만

공주가 이를 거부하였다. 왕이 노하여 궁궐에서 쫓아내니, 공주는 온달을 찾아가 혼인하였다.
그녀는 눈먼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바보스러운 남편 온달에게 무예와 학식을 가르쳤다. 공주의 도움과

가르침을 받아 온달은 뛰어난 무예를 지니게 되었다.
얼마 뒤 온달은 매년 3월 낙랑(樂浪)벌에서 열리던 사냥대회에서 남다른 활약을 보여 왕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온달고구려의 장수로 발탁되었다.
그 뒤 북주(北周)의 군대가 침공하여왔을 때, 온달고구려군의 선봉이 되어 적을 격파하고 대공을 세웠다.

평원왕을 이은 영양왕 때에, 온달이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수도로

돌아오던 중 죽었는데, 그 시체를 넣은 관을 운반하려 하였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달려와 관을 어루만지며 돌아가자고 말하니, 비로소 관이 움직여 이를 매장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온달전의 내용에서 전하는 평강공주의 행적은 당시 사회에서는 퍽이나 파격적인 것이다. 그

녀는 집안의 문벌이나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한 애정에 의하여 결혼을 한 훌륭한 여인으로 칭송되기도 하였다.
또, 불우한 처지의 남편을 도와 입신출세하게 한 현명한 아내의 본보기로 내세워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온달전의 내용을 보면 설화적인 면이 짙다.
그러나 그것을 전혀 허구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속에서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추출해보려는 시각이 필요하며,

다음과 같이 풀이하여 볼 수 있겠다.
먼저 당시의 시대상으로 보아, 그리고 위의 내용으로 볼 때도, 온달은 미천한 출신의 바보였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는 당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고급 귀족집안 출신은 아니었고, 아마도 하급 귀족 정도 신분의 인사로서 그 자신이

무사로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발탁되었던 인물로 여겨진다. 그러한 그를 왕이 사위로 맞이하려고 언약하였다.
그런데 이는 당시 신분제도와 관행에 비추어 어려움이 있고 또 반발도 있고 하여, 왕이 이를 취소하고자 하였는데

공주가 언약을 지킬 것을 고집하며 온달에게 시집갔다.
이 파격적인 공주와 온달간의 결혼을 두고 당시 귀족집안의 사람들이 야유와 시기를 하게 되어, 온달을 미천한 바보로

묘사하는 설화를 낳게 되었다.

자기들과는 다른 족속이나 신분에 속한 이를 이상하게 생긴 못난 인물로 묘사하는 예는 고대사회에서 널리 보이는 바이다.
이렇게 풀이하여 볼 때, 평강공주고구려의 귀족사회를 살아갔던 현명하고 정열적인 한 여인의 모습을 나타내주는 바이다.

 

남한강이 보이는 성산의 정상부근을 돌로 둘러쌓은 산성이다.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의  사위인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이 지방에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이 언제 쌓아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전기에 이미 성산성이란 이름으로 있었던 기록이 있다.
벽의 안팎을 모두 비슷한 크기의 돌로 가지런히 쌓아 올린, 둘레 683m의 소규모 산성이다. 성 안에는 삼국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며, 우물터가 남아있고, 성벽 바깥부분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배수구가 있다. 남서쪽 문터의 형식과

동문의 돌출부는 우리나라 고대 성곽에서 드물게 보이는 양식으로 주목할 만하다.
성의 북동쪽 남한강의 강변 절벽 아래에는 온달굴이라는 석회암 동굴이 있고, 성을 바라보는 북쪽 강 건너의

산에도 온달과 관계되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성벽의 보존 상태가 좋아, 축성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