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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여주]남한강변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명찰 신륵사

by 柔淡 2011. 11. 26.

여주보에서 강천보까지는 9km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 여주 읍내를 거쳐가야 한다.

가다가보니 세종대왕님이 모셔진 영릉과 효종대왕릉이 있고 신륵사 이정표도 보인다.

영릉엔 작년 가을에 들렀으니 생략하고 신륵사 주변이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서

신륵사로 행선지를 정했다.

 

신륵사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강가에 위치한 사찰로 예로부터 아주 크고

유명한 고찰이었고 그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드르이 사랑을 받는 절집이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4대강 사업을 한답시고 주변이 콘크리트로 도배가 되었고 입구와

진입로도 많이 바뀌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으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때부터 벽절[甓 寺]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있는

다층전탑(多層塼塔)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절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인 석등이 있으며, 유형문화재로는 극낙보전(極樂寶殿)

과 그이외의 부속건물로 구룡루(九龍樓) ·명부전(冥府殿)·시왕전(十王殿)·산신당·육각정 등이 있다. 

 

산속의 절집과 달리 강가에 세워 배치가 특이하고 시원하다.  

 

 세심정

 범종각

 

 

 관음전

 

 오래된 향나무

 다른 절집에서는 보기 드믄 봉송각 

 명부전

 8각원당 석조부도

 

 원구형 석조부도

 

 

 이 절집도 여기저기 공사가 한창이다.

 보제존자 석종으로 올라가는길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 석종형 승탑. 보물 제228호. 높이 190cm. 1376년 나옹이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檜巖寺)에서 경상남도 밀양으로 돌아가던 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자 1379년 각신과 각주가 절의 뒤편에 있는 봉미산 중턱에 묘역을 마련하고 나옹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다. 넓은 묘역을 마련하고 전면에 박석을 깔았으며, 그 위에 넓은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놓여 있는 2매의 판석 중앙에 석종형 부도를 안치했다. 기단의 정면과 좌우면 중간에 2단의 계단이 있고, 탑신은 위로 갈수록 완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부분에서 수평을 형성하고, 그 위에 보주를 조각했다. 이 부도의 형식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와는 다른 것으로 라마 탑계에 속하는 특이한 형식이다. 이러한 계단탑 형식의 부도는 통도사와 금산사 등에 있는데 이러한 형식을 모방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전개되는 석종형 부도의 선구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예이다

 

 

 석종비

신륵사에 있는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묘비(墓碑). 1379년 건립. 보물 제229호. 높이 212cm. 너비 61cm. 지대석 위에 3단의 직사각형 대석이 놓여 있는데 상단의 대석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얹었다. 대리석으로 된 비신의 양 옆에는 화강암 기둥을 세워 비신을 보강하도록 했으며 그 위에 목조건축물의 공포와 기왓골을 조각한 옥개석을 얹었다. 이러한 석비(石碑)의 조형은 이 절에 있는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와 비슷하다. 신라시대 이래 일반화된 형식인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고려 말기에 대석과 옥개석으로 변형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예이다. 비문의 내용은 이색(李穡)이 지었고, 글씨는 해서체로 한수(韓脩)가 썼다.

 석등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등. 보물 제231호. 높이 194cm. 전형양식에서 변형된 석등으로 화사석(火舍石)을 제외한 모든 부재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팔각 지대석 위에 기단부는 상대·중대·하대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8각의 하대석에는 복련이, 상대석에는 앙련이 도식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중대석(간주석)은 그 길이가 상당히 짧아졌으며 각 면에는 꽃무늬가 장식된 아(亞)자형 안상(眼象)이, 각 모서리에는 연주형(連珠形) 우주가 새겨져 있다. 상대석 위에는 2단의 층급이 있으며 그 위에 납석제 화사석이 있다. 팔각형의 화사석 각 면에는 화사창(火舍窓)이 뚫려 있고, 모서리에는 반룡(蟠龍)이 조각된 원형기둥이 고부조(高浮彫)로 새겨져 있다. 화사석의 상단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아래 기둥 사이에는 고부조의 비천상(飛天象)을 장식했다. 전각(轉角)이 두꺼운 옥개석은 둔중한 느낌을 주며 각 면의 합각에 우동(隅棟)만이 둥글게 돌출되어 있다. 상륜부는 연꽃이 장식된 복발 위에 2단의 층급을 이룬 연꽃 봉오리형 보주(寶珠)가 얹혀 있다. 전체적으로 석등의 우아한 형태와 장식성이 돋보이며, 기단부의 간주석이 짧아져 상대와 하대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은데 이는 석등이 형식화되어가는 시대적 추이를 반영한 것이다. 보제존자석종 앞에 있으므로 보제존자인 나옹의 부도가 세워진 1397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당

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指空)과 무학(無學)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정면 3칸의 맞배집인 명부전 내부에는 목조지장삼존(木造地藏三尊)을 비롯하여 시왕상(十王像)과 판관(判官)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나옹화상

 보수중인 극락보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797년(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으며, 1773년(영조 49)에 주조한 범종(梵鐘)이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千秋萬歲(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삼성각

 

 금륜당

 

  

 대장각기 비각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대장경 불사(佛事)를 발원한 것은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계승하여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신륵사의 승려 무급(無及)과 수봉(琇峯)이 중심이 되고 그 제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시주를 모았는데, 200여 명이 이 불사에 참여하였다.

이 중에는 각운(覺雲)·신조(神照)·자초(自超) 등의 고승들과 최영(崔瑩)·조민수(曺敏修)·최무선(崔茂宣) 등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1381년에 각주(覺珠)가 금자(金字)로 제목을 쓰고 각봉(覺峯)은 황복(黃複)을 만들었으며, 12월에 성공(性空)이 함을 만든 뒤 1382년 정월에 화엄종 소속 사찰인 영통사(靈通寺)에서 교열한 다음 4월에 배에 실어 신륵사에 봉안하였다.

또한, 대장각 안에는 대장경과 함께 권희(權僖)가 조성한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과 홍의룡(洪義龍)이 죽은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 그리고 강부인(姜夫人)이 시주를 얻어 조성한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을 봉안하였다.

 

 

 

이제 신륵사 주변의 풍광을 돌아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