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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강화]우리역사의 축소판, 강화의 국방유적 둘러보기 4 - 손돌목돈대

by 柔淡 2011. 12. 11.

무명용사비와 쌍충비를 지나 조금더 가면 오른쪽 언덕에 손돌목 돈대가 있다.

 

1679년(숙종 5)에 축조하였는데, 강화도의 다른 돈대들이 사각 모양인 것과는 달리 원 모양으로 만들었다.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외국 함대들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서,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파괴되었던 성벽을 복원하였다.

돈대 입구에는 서해안 지역의 북한계선 식물인 탱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손돌목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는데, 그 앞의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고 한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다.

 

지형상 이 지역이 바다로 돌출해 있는데 대안(對岸)의 강화도 광성보(廣城堡)가 있는 곳도 바다로 돌출해

있어 두 지역 사이가 좁은 여울의 형태를 이룬다. 따라서 밀물 때 이곳을 흐르는 해류가 급류를 이루어 배가 

건너다니기 어렵다. 손돌이라는 지명은 뱃사공의 이름에서 나왔는데 그에 관한 전설은 2개로 되어있다.

고려 때 몽고의 난을 피해 급히 이곳에 도착한 왕이 바다를 건너고자 할 때 손돌이 아직 바람이 자지 않았으니

쉬었다 건너자고 하여 왕이 그를 모반자로 생각하여 처형을 하니 광풍이 불이 바다를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왕이 크게 후회하여 그가 탄 말의 목을 베어 제사를 지내고 나니 바람이 잔잔하여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

고 한다.

또 하나의 전설은 왕이 탄 배가 바다를 건널 때 손돌이 배를 급류쪽으로 몰아 위험을 느낀 왕이 손돌의 행동을

의심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그가 죽기 전 자기가 죽은 뒤 바다에 바가지를 띠워 그 바가지가 가는대로 배를 몰면

안전할 것이라고하여 손돌을 죽인 뒤 그의 말대로 했더니 배가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이에 왕이 크게 뉘우쳐 손돌의 무덤을 만들고 크게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음력 10월 20일경인데, 이때는

겨울의 북서풍이 강하게 불어 겨울의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며 이 시기에 부는 바람을 손돌풍(孫乭風)이라고 한다. 

 

 

 

 

 

 

 

 염하수로

 

 

 

 

 

 

유속이 강물보다도 빠르고 소용돌이가 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