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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정읍]내장산 서래봉이 바닷물에 잠긴듯이 보이는 고내장 벽련암

by 柔淡 2012. 4. 3.

김제에서 점심을 먹고 다음으로 간곳은 내장산. 그런데 주어진 시간은 한시간 정도.

 

내장산은 내게 인연이 많은곳이다.

고등학교 2학년때인 1973년 처음 등산을 와본 이후 셀수없이 등산을 했고 단풍철마다

유군치서부터 서래봉까지 일주를 하거나 아니면 백양사까지 종주도 여러번 했었다.

2009년 여름에는 휴가차 들렀다가 세계적인 사진작가 클럽인 매그넘의 전임회장이셨던

압바스라는 분을 만나 부부가 함께 사진을 찍은 추억도 있었고 작년 가을 단풍 절정기에도

멋진 단풍을 보고 내장사에 들렀다 온 기억도 남는다.

 

그런데 벽련암에 들러본적은 몇번 안되어서 이번에는 왕복 한시간 코스인 벽련암까지만

다녀 오기로 했다.

그런데 벽련암의 입구인 벽련선원 건물에서 등산이나 단풍철 행락객들이 많이 올때 해볼수

없었던 특이한 체험을 해볼수 있었는데 바로 2층누각인 벽련선원 에 놓여진 툇마루에 누워서

서래봉을 올려다 보는것. 그러면 벽련암 대웅전과 서래봉이 꼭 바다물에 투영된것 처럼 보인다.

 

벽련암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인 내장사의 부속 암자이다. 660년(백제 의자왕 20)

환해() 선사가 창건하고 백련사()라 불렀다. 1539년(조선 중종 34) 나라에서 폐찰령이

내려 주변의 영은사()와 함께 불에 탔으나 뒤에 중창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정읍조에

백련사 혹은 내장사라고 하는 절이 내장산에 있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내장사()

라고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벽련암으로 이름을 바꾸라며 현판을 써 주었다.

1925년에는 계종()이 내장사를 이 절로 옮겨와 한때 내장사를 겸하기도 하였다. 계종은 이 때

극락보전과 요사를 중수하고 절 이름을 정식으로 벽련사라 하였으며, 1938년 혜순()이 내장사를

짓자 벽련사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1951년 1월 25일 불에 탄 것을 198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극락보전과 삼성각·선당 등이 있고, 유물로는 경내 서쪽편에 탑 형태의 부도가 전한다. 추사가

쓴 벽련암이라는 현판이 있었으나 6·25전쟁 중에 불에 타 없어졌다. 옛 절터가 1985년 8월 16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되었다. 절 뒤의 암벽에는 석란정()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는데, 전라북도

태인 출신의 여류 서예가 몽련당()이 쓴 글이라고 한다. 

   

 벽련암입구인 벽련선원 건물 툇마루에 누워서 본 대웅전과 서래봉. 하늘이 파랄수록 더 바닷물에 잠긴것처럼 보인다.

 내장사 입구

 

 산수유가 막 피어난다.

 벽련암 올라가는길. 일주문 오른쪽에 난길로 올라간다.

 

 

국립공원이라 겨우살이가 많이 남아있다. 

 

 

 

 

 

 

 벽련암 입구. 벽련선원

 

 

 암자인데 대웅전이 있는 이유는 여기가 원래의 내장사였기 때문이다.

 

 바로 본 대웅전과 서래봉

 산 미나리 씨앗차

 

 스님인줄 알았더니 산미나리차를 파는 노인이시다.

 

 부도탑과 천불전

 

 

 건너편에 내장사의 연봉들이 보인다.

 이 툇마루에 누워서 서래봉을 바라보면

 이렇게 보인다 

 

 

 

 

 원추리가 막 돋아나고 있다.이맘때쯤 채취해서 나물로 먹으면 참 맛있다 

 꽃무릇, 아니면 상사화의 잎이다. 초가을에 꽃이 피는데 잎과곷이 만날수 없어 상사화라고 부른다.

 다시 내려와 내장사의 일주문이다.

 내장사 들어가는길. 내장사는 생략했다.

 

 

 

 큰개불알풀

 

 

 광대나물

 제비꽃이 피어나는걸 보니 봄은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