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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논산]조선후기 중부지방 한옥의 모범, 명재 윤증고택 1 - 진입로와 전경

by 柔淡 2012. 5. 31.

명재고택은 중부지방에 있는 고택중 가장 잘알려져 있는 고택이다.

이번에 1박2일동안 머물면서 이 고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기에 사진과 함께 정리해 보고자 한다.

전반적인 외형은 지난번 명재고택의 새벽풍경에서 포스팅 했기에 생략하고 외부, 사랑채, 안채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정리한다.

주로 명재고택 홈페이지에 있는 한남대학교 건축공학과 한필원교수님의 글을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논산 명재 고택논산시청에서 약 6㎞ 북쪽 지점의 노성면사무소 인근 교촌리 노성산 남쪽 기슭에

노성향교, 노성 궐리사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논산 명재 고택은 조선 후기 숙종 대에 건립되어 후대에

수리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안채와 사랑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멸실되었던 사당은 1983년 복원하였으며, 수 차례에 걸쳐 안채·사랑채 및 담장·석축·연지 등을 보수, 정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4년 문화재 지정 당시 윤증 선생 고택이라 하였으나 2007년 1월 윤증 선생의

호를 따라 논산 명재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명재고택은 명재(明齋) 윤증선생(1629-1714)이 18세기초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집이 지어질 당시는

우리 사회 전반에 성리학적 사고가 이미 확고하게 자리잡은 시기이다. 따라서 이 한옥을 둘러보며 당시 성리

학자들의 주거관을 더듬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겠다. 윤증선생 고택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자리

잡고 있다. 파평 윤씨의 세거지인 노성면은 회덕지역과 함께 당시 정치사상계의 실세들이 뿌리내리고 있던

본거지였다. 윤증선생 고택의 바로 서측에 노성향교가 있기 때문에 동네 이름이 교촌리이다. 이 한옥이 자리잡은

곳은 예사롭지 않다. 한옥의 좌우에는 윤증선생이 평생 사모해마지 않았을 공자를 위시한 선현들이 모셔져 있고

전면에는 선생의 가슴에 한으로 새겨졌을 모친의 정려각이 있기 때문이다. 선생의 모친은 호란 중에 자결하여

정조를 지켰다.


한옥의 서쪽에는 노성향교가 있는데, 본래 지금의 노성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것을 1700년경에 이곳으로 이전

하였다. 향교란 다 알다시피 공자를 모시면서 지방의 젊은이들을 교육하던 관립학교이다. 윤증선생은 이 노성

향교에서 지방유림들과 교유하였을 것이다. 한편, 한옥의 동쪽 골짜기에는 노성궐리사가 있다. 궐리사 (闕里祠)란

공자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을 일컫는다. 노성궐리사는 현 위치에서 서쪽으로 있는 노성산 아래에 있던 것을

1805년에 이 자리로 이전한 것이라 한다. 당시 19세기초는 소론파가 정치적 주도권을 쥐게 된 시점이다.

궐리사는 이곳과 수원(화성궐리사) 두 곳에만 남아 있다.


 한옥의 남쪽 앞에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소나무 숲의 안산이 있고 이곳에는 윤증선생 모친의 정려각이 건립되어

있다. 이처럼 윤증선생 고택을 둘러싸는 곳에 의미심장한 시설들이 선생의 생전 그리고 사후에 조성됨에 따라서

이 한옥이 위치한 장소는 강력한 성리학적 분위기를 갖추고 지역사회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윤증선생 고택은 뒤의 주산에 의지하고, 지형을 잘 살펴서 아늑한 장소에 배치되었다. 이 한옥은 안채와 사랑채를

중심으로 곳간채, 안행랑채, 사당 등으로 구성된다. 한옥에 가까워지면서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이 앞에 너른 마당을

가진 사랑채이다. 그 오른편 뒤로 사당이 드러나고, 왼편 뒤쪽으로는 안채가 숨어있다.


 논산 노성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명재고택 전경

 고택입구의 정자목과 소나무슾, 풍수상 안산역할을 한다

 소나무숲을 지나면 고택의 전경이 드러난다

 연못쪽에서 본 소나무술과 정자목

 

 안채와 사랑채

 사랑채 건물

 고택의 오른쪽 언딱에 있는 도서실/회의실 역할을 하는 초연당. 후대에 지어진 건물이다.

 

 고택의 또다른 상징 장독대, 지금의 종손 윤완식씨가 만들었다.

 

 이 장독대가 고택을 더 돋보이게 만든다. 

 

 

 수령4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세그루 있다.

 사당

  한옥의 구성에서 사당은 가장 위계가 높은 공간이었다. 그래서 사당은 집터의 가장 높은 곳에 별도의 영역으로 자리잡고 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정침, 그러니까 안채의 동측 후면에 사당을 두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예학자의 집인 윤증선생 고택은 당연히도 그 원칙을 따르고 있다. 선생은 매일 아침 사당에 문안을 드리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고 전한다.

 

 

 담장 밖에서 본 안채

 

 안채와 사랑채 전경

 

 2008년 구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 방문 기념으로 심은 주목

 

 고택 왼쪽의 연못

 고택의 샘

 

 고택 왼쪽 연못위쪽에 새로 지은 행랑채. 한옥체험 시설이다. 

 행랑채의 화장실

 명재 윤증선생의 모친 공주이씨의 정려각.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명재 윤증의 아버지는 노서 윤선거로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형 윤문거와 함께 급제하였다. 1636년 나라 사신이 입국하자 성균관의 유생들을 모아, 사신의 목을 베어 대의를 밝힐 것을 주청하였다.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처 이씨(李氏)가 자결하였으나 윤선거는 평민의 복장으로 탈출하였다. 1651년(효종 2) 이래 사헌부지평·사헌부장령 등이 제수되었으나 강화도에서 대의를 지켜 죽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강화에서 부인을 잃은 뒤 노성 본가에 머물지 않고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 마하산 자락에 서재를 짓고 은둔하며 유계(兪棨)와 이웃에 살면서 강학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이때 『가례원류(家禮源流)』를 편찬하였는데, 뒷날 후손들 사이에 유계와의 공편 문제로 아들인 윤증송시열 사이에 배사론(背師論)이 일어났다.

 공주이씨 정려각을 세운 사연

 

 

 

 300년전에도 곷은 피었겠지?

 

 

 

이제 사랑채를 둘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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