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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논산]조선후기 중부지방 한옥의 모범, 명재 윤증고택 3 - 안채와 곳간

by 柔淡 2012. 5. 31.

다른 한옥과는 달리 명재고택의 안채는 사랑채와 연결된 행랑채에 둘러쌓여있다.

사랑채 옆으로 안채와 외부영역을 나누어 주고 한편으로는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해주는 안행랑채가 있다.

외부에서 안행랑채까지 아름다운 돌계단을 타고 오른다. 사람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이끄는 길이다.

안행랑채까지 이르러도 그 뒤에 있는 안채는 드러나지 않는다.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중문간에는 ‘내외벽’

이라고 해서 가벽이 설치되어 있다. 개방적인 사랑채와 달리 내밀한 공간인 안채의 프라이버시를 위한 건축적

장치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내외벽의 아랫부분이 뚫리어 있다. 안채에서는 그 개구부를 통해 방문자의 발을

 봄으로써 인기척을 확인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다음 손님을 맞았다고 한다.


  중문간으로 오던 길을 돌아다보면 앞으로 안산(案山)에 해당하는 언덕이 보인다. 이 시각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 건축에서는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안에서 밖을 보는 시각이 중요시되었다. 그러니까 전통건축을

보러가서 밖에서만 열심히 보고 오면 반도 못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항상 안에서 거주자의 주체적인 시각에서

어떻게 보이느냐, 무엇이 보이느냐를 중요시했던 것이다.


안채로 들어가보자. 정방형에 가까운 안마당이 있고 ㄷ자형의 안채가 그것을 둘러싸고 있다. 안채는 경상도 지방에

있는 으리으리한 저택들과 견준다면 소박한 건물의 규모이다. 이것은 기술이나 경제력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절제를

미덕으로 했던 당시 예학자의 지행합일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명재선생은 예학자로서 벼슬길에는 오르지 않았으나, 송시열에게 대항하는 소론파의 지도자였다. 선생의 청렴결백

함은 그의 일생을 적은‘명재언행록’에서도 속속 보여진다. 그러나 이 한옥은 어는 전문 기록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윤증선생의 생활 방식과 품격을 느끼게 한다. 정신적으로는 한없이 풍요로웠지만 물질적으로는 청빈했던 유학자의

삶이 전해오는 듯하다.


  안채는 수직적인 사랑채에 비해 수평적이다. 높은 기단의 사랑채와 달리 낮은 기단에 앉았다. 이것은 경상도의

사대부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충청지역의 고유한 특성이다, 이런 수평적인 조형은 일반적으로 비교적 평탄한

지형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ㄷ자형 안채의 가운데 부분, 전면 다섯 칸은 대청이다. 깊이 방향을 계산하면 8칸이다. 주택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크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너른 대청은 형식적으로 과장하려는 의도가 아닌 실용적인 이유로 말미암은 것이다.

대청은 안마당과 연결되어서 쓰이는데, 기본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다. 대청이 너른 것은 그만큼 제사가 많았고

참여자가 많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예를 행하는 의례공간, 대청, 시원한 넓이를 가진 이 공간 너머로 뒷뜰의 장독대가

보인다. 대청에는 반자를 달지 않았다. 그래서 대들보가 노출되고 서까래 선이 보인다. 한옥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선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도 있다. 보가 기둥에 비해 굵은 것도 시각적 과장을 위한 것이 아니다. 보가 두꺼워 안지붕의

무게를 효과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구조역학적 지식이 있다면, 한옥이 구조적으로 합리적이었음을 알게 된다.


  윤증선생 고택에서는 ㄷ자의 안채와 일자의 안행랑채가 흔히 ㅁ자라고 불리는 형식을 만들었다. 안채의 앞을 안행랑채로

낮게 막아서 열린 곳을 허하지 않게 구성하였다. 마을로, 주변으로 발산하는 사랑마당과 달리 안마당은 중심으로 모여지는

구심성을 갖는다. 이 한옥의 안채는 수평적이 조형으로 차분하고 밝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넋을 잃고 안채의 대청에

앉아있다 보면 금새 해가 기운다. 그래도 여전히 빛은 대청까지 들어온다. 빛이 스러질수록 오히려 차분하고 안정적인

느낌이 더한다. 마치 꽉 끼지도 않고 너무 헐렁하지도 않은 잘 맞는 옷을 입었을 때의 느낌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느낀다.

건물을 구성하는 치수들이 내 몸의 크기와 친밀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안채의 서쪽에는 안채와 곳간이 형성한 마당이 있다. 정적이고 구심적인 안마당에 비해 세장하고 동적이 비례를 가진 뜰이다.

안채의 동측면에도 좁고 긴 마당이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좁고 긴 마당들이 안채를 둘러싸고 있어서 정방형의 안마당은 더 돋보인다.


  안채의 동측 후면에는 며느리의 거처인 건넌방과 연결되는 마당이 있다. 곧 며느리의 내밀한 외부공간인 것이다. 마당의 모양을

따라 눈을 돌리니 몇 개의 단을 높이 만들어 놓은 곳에 큰 매실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단을 밟고 매실나무 아래로 가서 뒤꿈치를

들고 바깥세상을 엿보며 답답함을 달랬을 새댁의 모습이 연상된다. 바깥세상을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했던 며느리의 적적한 마음

에는 이 마당 위에 떠오르는 둥근 달이 얼마나 커 보였을 것인가.

 

대청과 안채마당, 흰천은 행사를 하기위해 차일을 친것이다.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

 

 내외벽. 손님이 잠시 머무는 곳이다. 안사람들은 아래쪽 공간을 통해 방문객의 신분을 어느정도 확인한다.

 대문에서 바라본 안산

 10칸 대청의 석까래. 한옥은 대부분 6칸대청 이면 크다고 했는데 이 고택은 대청만큼은 조금 크게 만들었다. 

 

 

대청의 뒤쪽엔 머름대 위에 세운 문얼굴이 있고 바라지창이 달렸다. 이 바라지창을 밀어 좌우로 열어 제치면 바로 뒤뜰, 후원이 바라다 보인다. 대나무숲이 무성한 후원의 시원한 바람이 여름의 더위를 씻어 준다. 트인 앞과 열린 뒷문을 통하여 부는 시원한 바람은 슬슬 부치는 태극선 하나로 시원한 여름을 지낼 수 있다. 대청은 여름에 시원하게 지내는 장소로도 유용하다. 잔치를 하거나, 음식을 장만하거나,여러 사람이 즐기거나,다듬이질하고 다듬질하는 일들이 진행된다. 제사도 여기에서 지내고 방문객과 환담도 할 수 있는 장소이다

 

바라지창의 옹이도 대칭이 되게 신경을 썼다.

 

 

 바라지창을 열면 시원한 풍경이 보인다.

 

 

 사랑채와 연결된 행랑채. 가운데 보이는 방이 손자방인데 여기서 하룻밤을 묵었다.

손자방. 아들방, 사랑채의 누마루, 할아버지방이 미닫이 문으로 다 연결되어 있다.

 펑소에도 불쑥불쑥 안채까지 마구 들어오는 사람이 있어 출입을 삼가해 달라는 팻말을 붙여 놓았다.

종손으로 지내면서 고택을 개방했을때 제일 어려운 점이 사생활이 없는것이라고 한다.

 며느리방

 

 

 사랑채에 연결된 행랑채. 왼쪽 앞쪽이 사랑채 뒷부분이다.

 

 며느리방 뒤쪽의 매실나무

 며느리방 뒤쪽의 좁은 마당

  대청 우측의 며느리방에 연결된 부엌

 중간의 칸막이 판자는 부엌에서 나오는 연기가 안방이나 대청쪽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가림막 역할을 하는 판자다.

 내외벽에서 좌측으로 보이는 곳간으로 가는 통로

 부엌의 봉당에서면 마을과 안산, 연못이 한눈에 보인다. 아녀자들의 시선도 충분히 배려한 구조다. 

 오른쪽이 안방과 부엌, 왼쪽이 곳간이다. 여기서 특이한것은 두건물의 처마선이다.

앞쪽은 트여있고 갈수록 좁아진다. 베루누이의 정리를 아시는지? 병의 목이 좁아질수록 기체나 유체의 속도가 빨라지는 현상을 말하는데

처마선이 저런 형태로 되어 있어서 안쪽으로 갈수록 바람이 시원해 진다. 이것도 대단한 지혜다. 

 곳간, 오래된 명문가의 흔적이 보인다.

 처마선을 반대쪽에서 본 모습

 

 이댁은 지금도 김장독을 땅에 묻는다.

 안채의 뒷쪽

 

 

 굴뚝, 다른한옥과 달리 굴뚝의 높이가 아주 낮다.

이것도 파평윤씨 명재 가문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생활에서 나타내는 표식이다.

예전에 보리고개가 되면 동네사람들은 굶어죽는데 이 집에서만 밥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면 동네사람들에게 미안하니까

연기를 낮게 흩어지게 하기위해 굴뚝을 저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 한가지 이유는 땔깜을 절약하기 위해서라고.

굴뚝이 높으면 땔깜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고 한다.

 

윤완식 종손도 어렸을때 하루에 한끼는 감자또는 고구마를 먹었기에 너무 질려서 지금도 감자와 고구마는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한다.

중학교까지만 논산에서 다녔고 고등학교는 서울로 유학을 갈 정도였고 집안에 일하는사람들이 여럿 있었는데 먹을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변 동네 사람들과 생활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부모님이 일부러 그렇게 시켰다는것이다.   

 그러니 양반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귀중한 보물 만이천여점을 충청남도 역사박물관에 기부하고 지금도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명재고택 봉당에 수십년된 박스가 있다.

웬만한 이들 같으면 벌써 내다 버렸을터, 그만큼 검소하게 살고 있다는 표시다.

명재고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지만 일일히 여기에 다 적지는 못했다.

300여년전에 지어진 이집을 이렇게 빈틈없이 관리하고 조상의 가르침에 따라 근면 검소하게 산다는것은 아무나 할수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나와 비슷한 연배인 종손 윤완식씨에게 진정으로 존경을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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