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당진]고려초기 부터 1100여년의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면천의 유적들

by 柔淡 2012. 8. 1.

면천은 지금은 당진군의 조그마한 면에 지나지 않으나 고려시대부터 현이 설치된 유서깊은 고을이다.

 

백제의 혜군(槥郡)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 혜성군(槥城郡)으로 고쳐 1018년(현종 9) 운주(運州: 지금의

홍성)의 속현으로 하였으며 후에 감무를 설치하였다.

1293년(충렬왕 19) 현인(縣人) 복규(卜奎)가 합단(哈丹: 원나라의 叛賊)의 침입을 막을 때에 공로가 있다 하여

지면주사(知沔州事)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 면천으로 고치고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당진군에 편입되면서 면천면이 되었다.

면천의 지명 유래는 이 지역의 서북쪽에 있는 고산(高山)에서 많은 내〔川〕가 흘러내리고 있어 ‘내가 흘러 가득

하다’라는 뜻에서 나온 듯하다.

선조 때 지변(地變)으로 5개 면의 육지가 바다로 변하여 주민들이 실의에 빠지자, 주민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매

윤년(潤年)마다 기지시(機池市) 마을에서 줄다리기를 실시하였다. 수상(水上)ㆍ수하(水下)의 두 팀으로 나누어

실시하는 이 행사는 오늘날 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산만에 면하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군사ㆍ교통상의 요지였다. 진산(鎭山)이었던 몽산(蒙山)에는 옛 성이 있으며

해안에는 창택산(倉宅山) 봉수가 있었다.

예당평야의 중심지에 있어 당진ㆍ신창ㆍ덕산ㆍ예산 등을 연결하는 교통망이 발달했었다.

 

면천을 대표하는 유적은 앞서 면천 두견주에서 소개한 수령 1100년이 넘은 은행나무와 안샘, 그리고 조선시대에

구축한 면천읍성이다.

 

면천읍성은 현재의 면천면 소재지 거의 전역에 걸쳐 평지성으로 축성된 석성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다듬어 축조하였는데, 저수지 공사 등의 사업에서 이곳의 돌을 빼다 써서 현재는 유실된 부분이

많으며 서쪽 성벽과 남쪽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서벽의 안쪽 부분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비탈지게 쌓았다.

성문은 4곳에 있었을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동문만 남아있고 성벽을 쌓는데 사용되었던 돌에 성을 쌓은 연대

‘기미년(己未年)’이라고 새긴 것을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충청도읍지》 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충렬왕 16년(1290)에는 감무를 두고

양문과 남문에는 문지가 있으며 옹성, 치성, 고(庫) 등이 구비된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의 읍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면천읍성 내에서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 조각이 성벽 주위에서 대량으로 발견되며 양식이나 수습되는 유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쌓은 전형적인 평지성임을 알 수 있으며 조선시대의 관방(官方) 시설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면천읍서 유적

 

 

 

 기미년에네치두께로 6천척을 쌓았다는 내용이 적혀있는 성벽

 

 유적 대부분이 면천초등학교 주변에 분포되어있다.

 수령 1100년의 은행나무

 

 

 두견주의 전설이 전해내려오는 안샘

 

 

 

 

 안샘 아래쪽의 군자정

 

 

 

 

 면천에서도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기념비

 역대 군수의 선정비

 

 

 면천초등학교내의 회화나무

 면사무소 앞의 풍락루

 

 면천초등학교앞 의 석물들

 

 

고려시대 이후 1100여년의 역사를 면면히 이어 내려오는 유서깊은 고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