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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종로]떠나가는 가을이 아쉬운 서울 최고의 단풍 4 - 창덕궁 연경당

by 柔淡 2012. 11. 22.

애련지를 둘러보고 바로 위족의 연경당으로 간다.

해마다 후원 관람의 동선이 바뀌는것 같다. 예전에는 함양문에서 가정당을 거쳐 부용지 위쪽을 지나 돌계단을

통해서 연경당으로 내려온적도 있는데 그 구간의 단풍이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연경당은 궁궐내부에 사대분 양반가처럼 지은 건물로 유명하다.

 

주합루와 영화당 구역을 감싸고 있는 작은 능선을 지나면 골짜기에 연경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 환경은

아름다운 숲과 연못 및 정자 등이 어우러져 이상적인 경관을 이루고 있다. 우측의 솟을 대문인 장양문은 사랑채로

통하고, 이 문을 지나 사랑마당에 들어서면 좌측에는 안마당과 사랑마당을 경계 짓는 담장이 꺾여 있으며 담장

가운데에 문인 정추문이 있다. 그리고 좌측의 평대문은 안채로 통하는 수인문이다.

사랑채와 안채가 담으로 구분되어 있기는 하나 한번 꺾여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전체 공간구성은 서로 연결된

만(卍)자 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경당이란 이름은 원래 사랑채를 가리킨 것이었으나 지금은 이 건물들을 통틀어

연경당이라 부르고 있다. 사랑채의 오른편으로는 서재 구실을 하는 선향재가 위치해 있으며, 선향재 뒤편의 경사진

언덕에는 화계를 설치하고 제일 높은 곳에 농수정을 배치하였다.

‘연경(演慶)’은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궁궐지』에는 순조 28년에 총 120칸으로 건립하였다고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에는 순조 27년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한 잔치를 베풀고자 1827~8년(순조 27~8)경 지은 효심이 담긴 집이다.

창건 직후 연경당에서는 효명세자가 신하를 접견하거나 진작례를 거행하였다. 헌종 대 이후에는 익종(효명세자)의

어진과 모훈을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다가 1857년(철종 8)에 터가 서늘하고 습하다는 이유로 익종의 초상화를 다른

곳으로 옮겨 한 동안 빈 집으로 남아 있었다.

그 후 고종 대에 이르러 외국 공사를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중요한 정치 공간으로 이용하였다.

사랑채 건물은 장대석기단 위로 사다리꼴의 초석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평주 위에는 장여가 도리를 받고 있는 굴도리

집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안채는 납도리로 되어 있으나 사랑채는 굴도리로 되어있다는 점과 안채, 사랑채 모두

각기둥을 사용했다는 점으로 조선시대의 남녀유별과 가옥규제에 대한 법령을 충실히 따랐음을 볼 수 있다. 사랑채

평면은 정면6칸, 측면2칸으로서 맨 우측에 누마루가 있고 가운데 4칸은 툇간을 개방하였는데, 4칸 중 우측2칸이

대청이고 좌측2칸이 방이다. 그리고 안채에서 뻗어 나온 온돌방 2칸은 이 마루 뒤로해서 사랑방에 1칸이 연결되어

있다. 안방의 서쪽과 뒤편으로는 사랑채까지 쪽마루가 연결되어 있어 사랑채에서 안채로 갈 수 있게 되어 있고,

이 경계 부분에는 판문을 달아서 개폐할 수 있게 하였다.

평면구성에 있어서는 왼쪽 끝에 누 1칸이 있으며 전면에 반 칸의 툇마루가 대청에 나 있다.

연경당은 건물배치와 공간구성 등에서 당시의 유교적 철학이 적용된 궁궐 내 사대부 집으로 당시의 주택과 비교해 볼 수

있는 한국주택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궁전의 조영법식과 기술력으로 건축되어 세련되면서 단아한 세부

양식이 궁궐건축 고유의 품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연경당은 조선시대 궁궐 내 사대부 건축으로서 그 가치가 뛰어나다.

 

 연경당 입구의 연못

 연경당 주변 숲의 단풍

 

 

 

 

 

 

 

 연경당 주건물

 초록부터 빨강가지 다양한 색상이 현란하다.

 

 

 

 

 

 

 

 

 

 

 

 

 

 

 

 

 옥류천까지 관람하고 밖으로 나가는길  연경당 좌측 담장 부분의 단풍길이다.

 

 

 

 

 

 

 

 

 여기부터는 광각렌즈로 찍은것

 

 

 

 

 

 

 

 

연경당에서 뒷문으로 나와 존덕정 구역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