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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경주]3국통일의 주역들이 묻혀있는 서악권 1 - 태종무열왕릉

by 柔淡 2013. 3. 8.

2008년 12월에 2박3일동안 데이지와 둘이서 경주를 둘러본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사관학교 동기인

친구부부와 네명이서 함께했다. 나는 군에서 일찍 떠나왔지만 친구는 34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올해 5월에 전역을 앞두고 있는데 지난 2월에 박사학위를 받아서 군생활을 마치는데 대한 위로와

박사학위를 받은걸 축하해 주는 여러가지로 의미깊은 여행이었다.

 

3월1일,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이라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해 집에서 새벽 여섯시에 출발했지만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지 천안휴게소까지는 고속도로에 차가 아주 많았다.

그래도 거의 밀리지 않고 고속도로를 달려 10시쯤 경주IC를 통과해 서라벌 관광안내소에서 잠깐

관광정보를 확인하고 제일 처음 찾은곳이 3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태종무열왕릉이다.

 

경주는 도시전체가 유적인데 크게 시내권, 불국사권, 보문권, 남산권, 서악권, 북부권, 동해권으로 나뉘어

있어 이번에는 예전에 가보지 못한 서악권을 먼저 가보기로 했다.

 

서악권은 경주의 서남쪽, 신라 오악 중 서악으로 불린 선도산 일대를 말하는데, 5~6세기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고 국방을 튼튼히 하여 나라 안팎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낸, 신라 23대 법흥왕부터 29대

무열왕에 이르는 삼국 통일의 기틀을 이룬 주역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김춘추 경주 무열왕릉과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1등 공신 김유신도 이곳에 뼈를 묻었다.
경주 무열왕릉 뒤쪽에 자리한 서악리고분군은 대릉원과는 또 다른 웅장한 위용이 느껴지는데, 정확히

누구의 묘들인지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고, 위치와 크기를 고려하여 무열왕 선조의 묘가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경주 무열왕릉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곳에는 무열왕과 김유신을 도와 백제, 고구려 정벌에 공을

세웠고, 일곱 차례나 당나라에 들어가 두 나라 사이에 중재와 해결에 탁월한 공로를 남긴,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와 비석받침이 남아있다.

서악권에서는 김유신과 김춘추, 김인문 등 삼국 통일의 주역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웅혼한 기상이 서려 있다.

 

먼저 태종 무열왕릉을 돌아본다.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아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신라 29대왕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무열왕릉의 좌측에 위치하고 있는 이 비는 현재 비몸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새긴 머릿돌만 남았다.


길이 333cm, 너비 254cm, 높이 86cm이며, 거기에 조각된 돌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 진취적인 기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높이가 110cm인 머릿돌 좌우에는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세 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물고있는 모습이며, 그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이 돋을새김되어 있어 비의 주인공을

밝혀 주고 있다. 이 비는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으로서 당시

석조 조각의 발달상을 엿볼 수 있다.

 

 

 

태종뭉열왕릉

 

김유신의 적극적인 지지로, 진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김춘추. 그가 29대 태종무열왕이다.
특히 외교에 능숙하여 당나라와의 연합을 성사시키고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에 성큼 다가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신라에서 처음으로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고분의 주인이 하루 식사로 쌀 서 말, 수꿩 아홉 마리를 먹었다고 할 만큼 기골이 장대한 이라서

그랬을까. 고분은 별다른 장식 없이 봉분이 매우 크다.
장식 없이 규모가 큰 신라 초기의 능으로는 마지막이라 할 수 있고, 무열왕릉 이후에는 호석을 세우는 등 화려한 능 양식이 등장한다.

 

경주에는 많은 고분이 있지만, 주인이 밝혀진 것은 드물고 ‘OOO의 능으로 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열왕릉의 경우에는 왕릉 앞쪽에 무덤의 주인을 밝히는 비가 세워져 있고, 머릿돌에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어 무덤의

주인이 확실히 밝혀진 능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무열왕에 관해서는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인연맺은 이야기, 고구려가 옛 고구려땅인 죽령 이북의 반환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고 꾀를 내어

고구려에서 빠져나온 이야기, 원효를 요석공주와 인연 맺어준 이야기 등 일화가 많다.

 

 

 

 

 

 

 

 

 

         

이제 태종무열왕릉 뒤쪽에 있는 서악리 고분군으로 가보자

무열왕릉 바로 뒤편, 경사진 구릉 위에 산 같은 고분 네 기가 솟아 있다. 경주 시내의 여느 고분군들과는 달리 장중한 위용이 느껴질 만큼 큰 고분들이다.
차례대로 능선이 겹쳐지면서 아스라한 풍광을 자아내는 고분들의 늘어선 모양새가 퍽 운치 있다.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으니 맨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1호, 2호, 3호, 4호분이라 부르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웃해 있는 왕릉인데, 추사 의견을 따르면 시대 차가 너무 크다거나 무열왕릉의 후손인데 무열왕릉보다 더 위쪽에 있는 점이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 등을 들어, 23대 법흥왕, 24대 진흥왕, 25대 진지왕, 무열왕의 아버지 용춘(문흥대왕)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발굴 조사를 하지 않아 내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 왕릉 가운데서도 큰 편에 속하는 점으로 미루어 왕의 무덤이라는 추정에는 아무 이견이 없는

듯하다. 이들 서악리고분군의 북쪽, 서악서원의 뒤쪽 산허리에도 또 한무리의 고분들이 있는데, 24대 진흥왕릉, 25대 진지왕릉, 46대 문성왕릉, 47대

헌안왕릉이라 전하고 있다.

 

 

 

 

 경주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태종우무열왕릉에서 나와 길을 건너면 둘째아들 김인문의 묘가 있다.

무열왕릉 동쪽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 이 무덤에는 김인문(629∼694)이 안치되어 있다.

김인문은 신라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의 친동생으로, 23세에 당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돌아와 무열왕을 도와 김유신장군과 함께

삼국을 통일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당나라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효소왕 때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태대각간이라는 관직을 추증하고 서라벌의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1931년 서악서원에서 김인문의 비석 조각을 발견하여 이곳이 그의 무덤임을 확인하였고, 무덤 밑둘레 82m, 지름 29.9m, 높이 6.5m로 겉모양은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형태이며, 부근에 비석을 세웠던 거북모양 받침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