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경주]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500년 전통의 양동마을 3 - 무첨당, 수졸당,심수정 일대

by 柔淡 2013. 3. 15.

관가정 뒤로 넘어가니 작은 오솔길이 나오고 고목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고목나무 아래로 가니 양동마을 일대의 모든 집들이 보인다. 2008년 겨울에 왔을때는 뒤쪽에도 마을이

있는지 알지못하고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양동천을 따라서만 마을구경을 했었다.

 

경북 지방 고문서집성(영남대 발간)에 의하면 여강 이씨(驪江 또는 驪州 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며, 그의 손서(孫壻)가 된 풍덕 류씨(豊德 柳氏) 류복하(柳復河)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고,

 

이어서 양민공(襄敏公) 손소공이 540여년 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이곳에서 살게 되었고, 후에 공신이 되어 고관의

반열에 올랐다.

 

또, 이광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5현의

한 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선생이 배출되면서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양동마을이 형성되었다.

 

양동민속마을이 외손마을이라 불리는 것도 이러한 연유이며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실제 남자가 처가를

따라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풍덕 류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고 한다.

 

여행을 다니면서 돌아본 곳중 율곡 이이의 강릉 오죽헌, 아산 외암마을 등 이름난 유적들이 처가살이한

덕분에 유산을 물려받고 후손들이 번성한 곳도 아주 많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남녀차별이 심해지면서

그런 관행이 사라지고 부계위주의 사회가 된 것이다.

 

 양동마을 일대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언덕

 

 

 

 

 

 

 

 

 탱자나무 울타리

 3월1일인데 산수유와

 매화가 봉오리를 맺고있다.

 

 

 

 

 여름이면 연꽃이 만발할텐데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던 동경이란 개를 키우는 집

진도개와 비슷한데 꼬리가 짧다.

 

  

 

 

 

 

 

 

 

 

 

 

 

 

 

 

 

 

 

 

 

시간이 없어 수박 겉 핥듯이 양동마을을 돌아 보았다. 제대로 돌아보려면 하룻밤 묵으면서 1박2일 정도는 머물러야 조금 알수 있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