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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밀양]아랑낭자와 함께보는 우리나라 3대누각중의 하나, 영남루

by 柔淡 2013. 7. 9.

점심을 먹고나서 두시부터 공연이 열리는 영남루로 간다. 전통시장에서 길을 건너 100 m정도의 언덕을 오르니 영남루다.

사실 여기는 처음 와보지만 영남루라는 누각의 이름은 들어본지 오래라서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지 친숙한 느낌이다.

 

영남루가 최초로 창건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에 그 전부터 있었던 작은 누각을 철거하고 규모를 크게하여

개창하였다고 하며, 현재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년)에 실화로 불타버린 것을 1844년(현종 10년)에 재건한 것으로 평양의 부벽루(浮碧樓)와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와 함께 3대명루(名樓)로 일컬어지고 있다.

영남루는 응천강(凝川江)에 임한 절벽 위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면이 5칸이요, 측면이 4칸으로서 간격을 넓게 잡은 높다란 기둥을

사용하였으므로 누마루가 매우 높으며 그 규모가 웅장하다. 좌우에 날개처럼 부속건물이 있어서 층계로 연결된 침류당(枕流堂)이 서편에 있고,

능파당(陵波堂)이 동편에 이어져 있다. 누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돌리고 기둥사이는 모두 개방하여 사방을 바라보며 좋은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하였으며 공포(공包)는 기둥 위에만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귀면(鬼面)을 나타낸 화반(花盤)을 하나씩 배치하였다.
안둘레의 높은 기둥위에 이중의 들보(樑)를 가설하고 주위의 외둘레 기둥들과는 퇴량(退樑)과 충량(衝樑)으로 연결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충량은

용의몸(龍身)을 조각하고 천장은 지붕밑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영남루를 거니는 아랑낭자들

영남루 전경, 좌측은 능파각이다.

 

 

 

 

누각과 서원, 정자, 명문가 고택 등에도 흥미로운 사연이 담긴 현판 문화재가 즐비하다. 영남루(밀양), 죽서루(삼척) 등 누각은 특히 현판의 경연장이라

할 정도로 누대에 걸쳐 수많은 명필과 시인묵객의 오랜된 필적이 전해오고 있다. 시대별로 현판의 모양이나 장식 등도 차이가 있어 그 시대의 특징을

잘 전해주고 있다.


편액에 쓰이는 한자 글씨는 액체(額體)라고도 하는데, 굵은 필획으로 써서 뚜렷하고 분명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리고 글씨 짜임새가

긴밀하고 필획은 방정하면서도 강건한 글씨여야 하기에 주로 해서(楷書)를 많이 썼다. 편액 글씨체로 원나라 승려 설암(雪庵) 이부광(13세기)의 글씨가

고려말에 수용된 이래 공민왕을 비롯해 많은 이가 설암 서법을 따랐고 편액에도 애용되었다. 설암은 안진경과 유공권의 글씨를 배워 특유의 해서 서법을

이루었다. 특히 그의 대자(大字)는 조맹부의 송설체와 더불어 편액 글씨로 널리 사용되었다.

명말청초의 학자 도종의(陶宗儀)가 지은 ‘서사회요(書史會要)’에는 설암 이부광에 대해 “글씨와 그림은 신품의 경지에 올랐다. 그의 서법 학문은

안진경(顔眞卿)과 유공권(柳公權)에서 나왔으며, 해서·행서·초서를 잘 썼다. 큰 글씨는 더욱 잘 썼다. 조정의 편액은 다 그의 글씨”라고 적고 있다.

설암체는 편액 글씨체로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도 계속 유행했다. 궁궐은 물론 전국 곳곳에 전하는 사찰, 서원 등 편액에서 설암체의 서법을 만나볼 수 있다. 설암의 대자 글씨 설암체는 그의 ‘병위삼첩(兵衛森帖)’‘춘종첩(春種帖)’ 등에 전하고 있으며 세종실록에는 “새로 간행한 ‘설암 법첩’을 종친, 의정부, 육조,

집현전 등의 관원들에게 나누어 주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조선 초기부터 설암의 대자 글씨가 널리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44년에 중건된 건물인 현재의 이 누각에 그 가치를 더하는 것이 있다. 여러 명필의 다양한 글씨 현판들이다. 각기 개성적인 필치의 멋을 자랑하는

대형 글씨 현판들이 누각 안팎에서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현판 글씨의 전시장이라 할 만하다.

‘영남루(嶺南樓)’ 편액만 3개가 걸려 있고, ‘교남명루(嶠南名樓)’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 ‘용금루(湧金樓)’ ‘강성여화(江城如畵)’ 등 영남루의 위상을

말해주는 다양한 글귀의 대형 편액도 9개나 된다. 이와 함께 이황, 이색, 문익점 등 여러 유명 문인의 시와 글을 새긴 현판도 많이 걸려 있다.
한때는 이같은 현판이 300개나 걸려 있었다고 전한다.

영남루 앞에 서면 큰 편액들이 처마를 대부분 가릴 정도로 여러 점 걸려 있어도 멋진 누각의 모습을 해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근래 멋진 한옥 건물을

지어놓고도 졸렬한 글씨의 편액을 걸어 건물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사례들과 비교된다 하겠다.
영남루 북쪽 처마에는 세 개의 대형 편액이 걸려 있다. ‘영남루(嶺南樓)’가 중앙에 있고, ‘강좌웅부(江左雄府)’와 ‘교남명루(嶠南名樓)’가 좌우에 있다. 글씨가 모두 유려하고 아름다워 눈길을 시원하게 한다.

시원하고 자연스러운 행서체인 ‘영남루’ 글씨는 당대 명필로 유명했던 송하(松下) 조윤형(1725~99)이 썼다. ‘무신(戊申) 월(月) 일(日)서(書)’라는

낙관 글씨와 ‘조윤형인(曺允亨印)’이라는 도장이 새겨져 있다. 무신은 조윤형의 생몰년대로 보아 1788년으로 보이는데, 현재의 건물을 중건하기 전의

누각에 걸려있던 편액인 것으로 추정된다. 64세의 나이에 쓴, 무르익은 필치를 잘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영남루는 신라 때 창건된 영남사(嶺南寺)라는 사찰이 있던 자리에 건립되었다. 1365년 남아있던 사찰의 작은 누각을 헐고 새로 지은 뒤 영남루라 명명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60년에 중수하면서 규모를 크게 했으며, 선조 때 소실되자 1637년 다시 지었다. 그리고 지금 누각은 1844년 다시 세운 것이다.

송하는 어려서부터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서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원교(圓嶠) 이광사(1705~1777)에게 글씨를 배웠으며, 각 체의 글씨에 능했다. 특히 획이 굳세고 예스러운 해서와 초서·예서를 잘 썼다. 원교의 스승인 백하(白下) 윤순(1680~1741)의 사위이기도 한 그는 벼슬을 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1766년 글씨로 벼슬길에 올랐다. 원교를 이어받아 진경시대 글씨를 빛낸 대가인 그는 정조가 가장 총애했다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림에 정선과 김홍도가

있다면, 글씨에는 조윤형이 있다는 이야기가 회자될 정도였다.

이처럼 글씨로 벼슬을 할 정도로 당대 명필로 이름이 났던 송하는 당시 관청의 금석과 편액 글씨를 도맡아 썼다고 한다. 진주 ‘촉석루(矗石樓)’ 편액,

수원 화성행궁의 ‘신풍루(新豊樓)’ ‘봉수당(奉壽堂)’ ‘낙남헌(洛南軒)’, 영주 풍기의 ‘금선정(錦仙亭)’, 공주 마곡사의 ‘심검당(尋劒堂)’, 김천 직지사의

‘황악산직지사(黃嶽山直指寺)’ 편액 등이 남아있다. 시원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글씨들이다.

직지사 일주문에 걸린 해서 편액 ‘황악산직지사(黃嶽山直指寺)’에는 ‘경인하절(庚寅夏節)’이라는 글씨와 ‘조윤형인(曺允亨印)’이라는 도장이 새겨져 있다.

그가 45세 때인 1770년에 쓴 것이다.


 

영남루에 오르면 여러 개의 대형 편액이 눈길을 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편액은 ‘영남루’와 ‘영남제일루’다. 보기 드물게 큰 글씨의 편액이다.

누가 썼는지, 즉 글씨를 쓴 주인공이 7세와 11세 아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더욱 놀라게 된다.
‘영남루’ 편액을 보면 7세 아이가 썼다는 기록이 있다. ‘계묘초하한이현석칠세서(癸卯初夏澣李玄石七歲書)’라는 글귀다. ‘1843년 초여름 이현석이

7세 때 쓰다’라는 내용이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자신의 키보다 컸을 큰 글씨를 어떻게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글씨도 힘이 있고 잘 썼다. 확대복사할 수 있는 기계도 없던

옛날이라 편액 글씨는 편액 크기에 맞는 큰 글씨를 써야 했는데, 믿기 어려운 아이 글씨가 아닐 수 없다.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이 편액 글씨는 서예가들로부터도 불가사의한 필력으로 회자되어 왔다.

누각 안 중앙 대들보에 걸려있는 ‘영남제일루’ 편액도 마찬가지다. 이 글씨는 ‘영남루’를 쓴 이현석의 형인 이증석이 11세 때 같은 시기에 썼다.

‘계묘초하한이증석십일세서(癸卯初夏澣李憎石十一歲書: 1843년 초여름 11세의 이증석이 쓰다)’라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다.

이 두 형제는 건물을 중수할 당시 밀양부사로 있던 이인재(李寅在) 부사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었다. 서예 신동으로 불리던 이 어린 형제에게

편액 글씨를 쓰게 한 것으로 보인다. 1844년 누각을 준공한 것으로 되어있으니 글씨는 1년 전 준공 전에 쓴 것이다. 두 편액 글씨는 비슷한 필체의 해서체다.
 

 

 

 

 

 

 

 

 

 

 

 

 

 

 

 

루위에 오르면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식혀준다.

작년 아랑낭자로 선발된 두 아가씨가 포즈를 취해준다.

아랑낭자는 진선미ㅍ정숙현 등 여섯명을 선발하는데 이들은 선과 미로 봅혔다고 한다. 고전적인 단아한 미모다.

 

옆면 아래에서 올려다본 영남루 

기둥이 네개인 사주문

영남루에서 내려다본 풍경

 

 

 

 

 

 

 

 아름다운 풍경과 다양한 편액의 글씨 등등이 영남루가 왜 조선의 3대 명품루각인지 말없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