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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밀양]불교와 유교가 한자리에 공존하는 특색있는 사찰, 표충사

by 柔淡 2013. 7. 16.

즐겁고 바쁜 밀양여행중 토요일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로 선택한곳은 마리포사라는 밀양에서는 이름난 모텔이다.

지나치는 도시 밀양이라 숙박시설이 별로 없어서인지 "밀양" 이란 영화를 찍을때 전도연과 송강호가 머물럿던 곳이라 한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데 일요일 아침 첫 목적지가 표충사라 07시에 기상해서 준비를 한다음 표충사입구 상가에 있는

약산가든에서 맛있는 아침식사를 하고 아홉시부터 표충사를 둘러보았다.

 

등산에 미쳐 전국각지의 산을 찾아다닐때인 2005년 11월 서울을 출발해 무박으로 배내고개 - 능동산 - 얼음골입구 - 천황산 (사자봉) -

재약산 - 고사리 - 층층폭포 - 흑룡폭포 - 표충사를 지나왔고 전부 7시간이 걸렸었다.  

 

영남알프스라 불리는 밀양 재약산(해발 1,189m)기슭에 자리하는 표충사는 유생들을 교육하고 성현들을 제사하는 표충서원이 사찰영역

안에 있어 불교와 유교가 한 자리에 공존하는 특색 있는 사찰이다.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죽림사(竹林寺)라 한 것을 신라 흥덕왕 때부터 영정사(靈井寺)라 하였고, 1839년(헌종5)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한 서산, 사명, 기허대사를 모신 표충사당(表忠祠堂)을 이곳으로 이건(移建)하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

(表忠寺)가 되었다.

표충사는 신라시대 때부터 고려시대까지 보우국사(889),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국사(1286), 천희국사(1290)가 선풍을 관장하여 일국의

명찰이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사명대사의 8세(世) 법손(法孫)인 월파당 천유(月坡堂天有)화상이 8도 도총섭(八道都摠攝)에 올라

전국사찰(八道寺刹)의 승규(僧規)와 풍기(風紀)를 감찰 단속하는 규정소(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근대에는 조계종 종정과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曉峰)선사가 주석하다가 입적한 곳이다.

예부터 명산유곡으로 이름이 높았던 표충사 일대에는 수많은 고승대덕들이 남긴 각종 전설들이 전해 온다.

 

 보물 467호 표충사 3층석탑

 일주문

 

 

 

 

 

 

 

 

 

 

 

 

 

이 탑은 표충사(表忠寺) 경내에서 사천왕문(四天王門)을 들어서면 만일루(萬日樓) 앞 마당에 있는데, 기본적인 양식이 신라통일시기의 석탑 유래를 따르고 있는 단층(單層) 기단(基壇)의 3층석탑(三層石塔)이다.

조선조 숙종 3년(1677년)에 작성된 『영정사고적기(靈井寺古蹟記)』에 의하면 현재의 표충사가 신라 흥덕왕 4년(829년)에 인도의 황면선사(黃面禪師)가 창건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탑의 조성년대도 이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기단(基壇)의 형식은 단층(單層)이나 7매(枚)의 두꺼운 판석(板石)으로 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24cm 정도의 제법 높은 2단의 각형 받침이 마련되고 그 위에 기단부(基壇部)를 형성하므로써 상하층 기단의 효과를 살리고 있으며 탑신부(塔身部)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개씩의 돌로 되어 있다. 옥신(屋身)은 대체로 높은 형태를 보이고 옥개석(屋蓋石)은 첫층부터 차례로 체감되었으며 추녀밑은 수평(水平)을 이루고 낙수면(落水面)은 우아한 경사를 이루었다. 옥개석(屋蓋石)의 머리에는 풍경(風磬)을 달아 운치를 살렸고, 상륜부(相輪部)에는 1m 남짓한 찰주(刹柱)가 아직도 남아있고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수연(水煙)등이 있으나 그 가운데는 뒤에 보수(補修)된 흔적도 남아 있다. 이 탑(塔) 옆에는 석등(石燈)도 1기(基)가 서 있으나 본래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대광전

 특이하게 궁궐에 있는 잡상이 대광전 지붕위에 잇다.

 

 

 

 

 

 

 

 

 

 

 

 

 

 

 

 

 

 

 

 

날씨가 흐리다 맑다 변화무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