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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동유럽·발칸7개국

동유럽/발칸 044 - 0423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서 물의 마을 라스토케로

by 柔淡 2016. 6. 25.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를 잠간둘러보고 이번에는 물의 마을 라스토케로 간다.

아침에 헝가리에서 이곳 크로아티아에 올대도 잠간 느꼈었는데 크로아티아는 수도인 자그레브도 그렇고 라스토케로 가는 도중에

나타나는 농촌마을도 유난히 황폐하고 초라해 보인다. 우리가 방송에서만 봐 왔던 중세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고 여기저기 전쟁의 흔적인 부서진 집과 포탄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피폐한 나라처럼 보여진다.

같은 공산권 국가였던 헝가리보다 유독 더 심하게 가난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가는도중 차안에서 가이드의 해설을 듣고나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얼마전까지 내전이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란다.


내전은 1991년 6월 27일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막기 위해 슬로베니아를 침공함으로써 시작되어,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보스니아 → 코소보 등지로 싸움터를 옮겨가면서 벌어졌다. 그 사이 주요 민족의 분포에 따라 6개 공화국,

2개 자치주로 이루어졌던 유고슬라비아 연방국은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신유고 연방·마케도니아로 분리 독립

되어, 민족간 대립을 격화시켰다.


〈슬로베니아 내전〉 인구의 90% 이상이 슬로베니아인으로 구성된 슬로베니아를 지배할 명분이 없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10일간의

전투 끝에 이들의 독립을 사실상 묵인하고 철수하였다.


〈크로아티아 내전〉 크로아티아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나자 1992년 4월 1만 4000명 규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어 완충 역할을

하였으나 유혈 충돌이 계속되었다. 세르비아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인의 극단적 민족단체인 우스타샤가 세르비아인 50여

만 명을 학살하였기 때문에 크로아티아가 독립할 경우 이 지역에 소수민족으로 남을 세르비아계 주민이 다시 학대를 받을까 우려하여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막은 것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 인구 450만 명의 보스니아는 이슬람계 43%, 세르비아계 32%, 크로아티아계 17% 등 다민족으로 구성

되어 있으며 이 중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가 독립을 강행하자 세르비아계는 민족별 분리를 주장하여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이 지역의

내전은 다른 민족에 대한 '인종청소'의 양상을 띠어 방화·살상·강간이 자행되어 1995년까지 2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코소보 내전〉 세르비아 공화국의 코소보주() 주민의 90%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은 세르비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여

코소보 해방군을 조직하였고, 세르비아 보안군은 이들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알바니아인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인종청소'를

경고하여 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유고슬라비아가 이를 묵살하자 1999년 3월 24일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공습을 단행하여 계속

압력을 가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인명 피해는 아직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알바니아계 난민은 40∼50만에 이르러 인근 마케도니아

등지로 피난하였다.

코소보 지역을 제외한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1995년 12월 파리에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의 세 대통령이 평화협정에 조인함으로써

표면상 종식되었으나 크고 작은 30여 민족과 여러 종교가 혼재한 이 지역은 여전히 그 분쟁의 씨를 안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고슬라비아 내전 (두산백과)



20년전까지 비행기의 폭격과 로켓탄의 공격 등으로 수도 자그레브부터 남족끝의 두브로브닉까지 전쟁의 흔적이 남게 된것인데

아직 그 흔적을 지우지 못한것이다.




수도 자그레브의 아파트촌

약간 초라해 보인다







전쟁이 할퀴고 간 기차역

자그레브에서 한시간 정도 떨어진 시골역이다.






자연 풍경은 아름다운데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총탄자국과

무기들


부서진 집들









 자그레브에서 라스토케 까지는 두시간이 걸린다.